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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타종교와 기독교

1910 YMCA 진관사 여름 하령회

[이 기사를 보면서] 진관사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190122/93813493/2
 
 
은평구 진관사의 태극기도 중요하지만, 기사에 있는 대웅전을 배경으로 한 흑백 사진에 있는 모임이 관심을 끈다. 사진에 있는 자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다. 모자를 쓴 여성도 있다. 복장으로 볼 때 이들은 진관사에서 며칠 지내는 모습이다. 맨 앞에 앉아 있는 양복 신사는 일본인인 듯하다.

The first summer retreat of the YMCA was held at Chin-gwan Temple, Samgak Mt. near Seoul in June 1910.

1910년 6월 22-27일 서울 삼각산 진관사에서 열린 제1회 YMCA 하령회(여름 수련회)이다.

 

따라서 진관사 스님들이 새벽 예불을 드리고 나면,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토론회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진 한 장으로 개신교와 불교 관계가 원만했다고 보면 곤란하다. 물론 그 이전 선교사들이 아이를 낳거나 여름 피서를 위해서 북한산이나 남한산의 사찰을 애용했다. 특히 성공회 선교사들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여름을 지냈다. 1893년 첫 아이를 해산하러 북한산 중흥사에 간 장로교회의 무어 선교사가 절에서 버리려는 나한전의 작은 불상을 넘어트리는 무례를 범하기는 했으나 작은 해프닝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 불승 선교사들이 대거 서울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 정부가 금해온 불승들의 서울 도성 출입이 해제되었다. 이후 불교는 서울에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기독교계와 큰 충돌은 없었으나, 불편한 관계였다. 이미 일본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여러 차례 논쟁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종교 논쟁이나 충돌은 없었다.

1895년부터 대량 반포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소책자들을 보면, 불교를 우상숭배의 종교로 적극 비판했다.

1896-98년 개화파 내각과 독립협회는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무당의 굿을 미신으로 금하고, 불교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일부 신자들은 허물어져 가는 작은 절의 불상을 파괴하기도 했다.

따라서 개신교와 불교 간에 어떤 우호적 행사나 만남이나 대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사진에 나오는 진관사에서 기독교청년회 제1회 하령회(여름 수련회)가 열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주지가 누구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초월 스님이었다면 청년회의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장소를 허락해 주었을 것이고) 여름에 잠시 사용하는 것이므로 전통적인 사찰의 손님 대접과 호의 베풀기 차원에서 허락했을 것이다. 

그것을 개신교와 불교가 마치 사이 좋게 지낸 것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 한 예가 다음 문서 논쟁이다. 1909년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서이자 개신교 호교론 소설인 최병헌 목사의 <성산명경>이 나와서, 불교를 비판하고 불승의 개종을 주장했다. 이를 본 백용성은 1912년 <귀원정종>을 집필하여 개신교의 불교 비판을 강하게 비판하고 불교의 우위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 유명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도 불교의 세상 구원론을 천명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우위를 논했다.

1900-1910년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종교 시장을 놓고 경쟁하면서 서로를 비판하는 문서 전쟁을 벌였다. 1910년 전후에는 전열을 가다듬은 불교계가 개신교를 비판하고 나섰다.

1910년 진관사 사진 한 장이 두 종교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귀한 사진이지만, 장소만 빌려서 사용한 그 사진 하나로 당시에는 두 종교 사이가 좋았는데, 이후 나빠졌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처음부터 개신교는 불교에 대해서는 우상 숭배의 종교로 강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