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삼, “교회 死活問題,” 「기독신보」 (1929년 11월 27일; 12월 4일; 12월 11일)
개신교인 1916년 → 1927년에 20만 명 줄어 -7.5%
| 인구 | 교인수 |
1910 | 13,128,780 | (200,000) |
1916 | (14,600,000) | 279,586 |
1927 | 18,661,494 | 259,076 |
()안은 추정치
1916년 교인 279,586명이 1927년 259,076명으로 줄어 -7.5% 성장을 보였다.
인구가 약 400만 명 증가할 때, 개신교인은 약 20만 명이 줄었다.
전체 인구에서 교인의 비율은 10년 만에 1.9%에서 1.4%로 감소했다.
시대의 변화, 사조의 변화, 청년 세대의 변화 등으로 교회가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
"의무 잃은 교인"(한 때 교회를 나왔으나 이제는 잘 안 나오는 가나안 교인)이 속출했다.
1929년 교계 연합신문 <기독신보>에서 양주삼 목사는 교회의 사활 문제를 논했다.
논의할 문제는 다음 네 가지 四自였다. 간단히 요약한다.
1) 자급: 한국인 1인당 평균 소득은 94.43엔이다. 재조선 일본인은 그 10배이다.
가구당 부채 평균이 95.88엔이다. 한 해 소득만큼 빚이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 자급은 불가능하다.
2) 자전: 1924년 교회수는 4,615개였으나, 1928년 3,504개로 줄어 4년만에 1,111개나 감소했다.
그러나 신자를 충실히 하면 전도는 가능하다.
3) 자발: 교역자들이 교회를 관리할 재능과 경륜이 있느냐 하는 문제 [전통적인 용어로 자치]
4) 자치: [양주삼은 토착화를 자치로 표현한다]
믿는 바 도리와 심중에 얻은 바 경험을 시, 미술, 글, 건축 등에서 한국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독자성을 표현하는 토착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국풍의 찬송가가 한 예이다.
90년 후 한국교회 다시 死活을 논하게 되었다. 제4항은 현대에 와서 자기 신학(self-theology)으로 정리하고 있다.
쇠퇴하는 한국 개신교, 알파고 앞에 고뇌하며 연구하던 이세돌 만큼은 진지해야 하지 않을까?
양주삼 총리사 김매륜 부부, 1930
2016. 6. 15 옥성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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