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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00s

대세를 따른다는 것

대세 순응

시세의 변화와 세태의 변천을 따라 가는 소위 진보적 기회주의가 지난 120년 간 한국인의 처세술로 자리 잡았다.

1. "一進 宣言," 1906년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1905년 전후 일진회(一進會)의 모습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일진회가 발표한 다음 선언문(1906년 3월 5일자 <황성신문>)에서 보듯이, 문명 진보국을 건설하려면 1) 경제(실업)개발로 먹거리를 늘리고 2) 교육으로 인지를 넓히고 풍속을 개량하는 두 가지 강령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청색 부분인 "時敏世運之變遷"과 "隨世態之進運"이다. 세상 운수가 변천해 가는 것에 그때 그때 민감하고, 세태가 나아가는 모양을 따라가는 적응에 능한 기회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한 마디로 진보의 옷을 입은 인기영합주의와 전문가의 탈을 쓴 곡학아세가 이후 40년을 풍미했다.

2. 신사참배 가결, 1938년

1937년 제2차 中日전쟁이 발발하고 만주국이 수립되고 중국 해안지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던 때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되어 유럽의 강자로 등장했다.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 학교를 폐쇄시키는 강경책을 몰아부쳤다. 평양의 학교들에 이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도 폐교하는 학교들이 속출했다.

이에 1938년에 접어들면 장로교회의 경우 선천노회가 먼저 신사참배를 애국행위로 규정하고 전 학교와 교회가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다음 기사처럼 여러 노회와 도시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된다. 그 이유가 "대세에 순응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교리에 어긋나도 대세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9월에 총회가 열리기 전 거의 모든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9월 9-10일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을 위한 마지막 요식 행위였다.

진보주의가 기회주의로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고리타분한 퇴행적 보수주의로는 시대를 이끌지 못한다. 그러나 시세 변천을 따르는 진보/일진의 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1920-30년대 감리교회는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영어와 일본어에 능하고 진보적인 우수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친일파가 되어 제국에 충성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진보의 가치를 자신의 입신양명에 이용하는 자들이 90년대 이후 늘어났다. 대세를 따르고, 국민의 뜻을 따르고, 여론을 따르고, 교인 다수의 투표 결과를 따른다고 해서, 늘 바른 길로 가는 것은 아니다. 바른 길은 좁아서 대개 가는 사람이 드물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고독의 길에 생명이 있다.

짧은 인생, 바른 길로 갈 때, 유한한 시간이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