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옥 교수의 글 /단어 공부

절하다 = 예배하다?

[절하다 = 섬기다 = 예배하다?]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구절인 출 20:4-5을 보자.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개역개정)
여기서 5절의 절하다와 섬기다 부분을 영어로 하면, "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이다. 
"절하다"는"bow down"(엎드려 절하다) =  שָׁחָה = 제국의 황제 앞에 엎드려 절하다와 비슷한 말. 충성, 복종의 뜻.
"섬기다"는 "worship" =  עָבַד = serve= 종이 주인을 위해서 일하고 섬기다의 뜻. 노예. 즉 노예처럼 제국의 권력에 충성하는 태도이다. 인격이나 정의는 들어갈 틈이 없는 그런 체제에 굴종해서 사는 태도이다. (이 뜻 부분은 오늘 토론 안 함)
히브리 병행구문으로 절하다 = 섬기다 = 예배하다의 뜻이다.
 
그러나 영어나 히브리어 문자대로 하면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안 되고 그를 위해서 일하면 안 된다. 그러면 서서 하는 반배는 괜찮은가? 거수 경례나 목례는 허용되는가? 벌써 한국어 절하다와 원어 bow down이 다른 의미가 있음을 느낀다. 한국어에서 "섬기다"는 예배하다, 경배하다의 worship보다는 상관이나 손님에게 service하는 뜻이 강하다.
 
한국어에서 "절하다"는 다양한 뜻을 가진다. 존경과 예의의 표시로 하는 행위가 많다. 세배하는 것이나, 어른이나 선생님이나 윗 분에게 인사하는 뜻이 강하다. "경례하다"는 거수경례를 연상시키는 단어로, 군인이나 경찰이나 교복을 입은 학생이 상관이나 국기 등에 존경과 예의를 표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귀신에게 절하다에서는 다른 뜻이다. 그 귀신을 섬기고 그 귀신의 도움을 받아 복을 누리자는 뜻이 있다. 돈에게 절하다, 권력에게 절하다로도 쓸 수 있다. 그 힘에 자신의 신념과 자유를 포기한다는 뜻이 들어간다. 
 
내 요점은 성경의 "절하다"(= 섬기다 = 예배하다)와 한국인이 이해하는 절하다라는 단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절하다는 예배의 뜻이고, 일상 한국인이 사용하는 절하다는 대개 존중, 경의, 존숭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불일치를 다음과 같이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성경 원어와 한글 번역어 의미의 상호 불일치에 대해서는 다음 내 글을 참고하라.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218)

한국어에서 "절하다"는 반드시 "예배하다"가 아니며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출 20장 4절을 문자대로 지키려면 모든 조각상을 만들면 안 된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예술품으로서 여러 위인들, 신학자들, 목회자들의 동상이니 석상을 만드는가? 조각상을 만들어 신학교나 교회에 두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바로 형상, 우상, 조각상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의미, 상징 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다.
 
5절 한글 번역을 문자대로 지키려면 어떤 물상/형상/상징 앞에서도 경례를 하거나(예, 국기 경례), 묵념(예, 현충사나 사당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는 묵념)을 해서도 안 된다. 서원이나 박물관에서 가서 퇴계나 율곡의 초상화나 동상 앞에서 간단히 머리를 숙이고 존경의 태도를 보여서도 안 된다. 다 "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절의 이 "절하지 말라"는 문구 때문에 숭경, 존중의 의미로 절하는 것도 한국 보수교회는 못하게 했다. 그래서 해방 직후 고신 교단은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문자적 해석과 역사적 경험 때문에 나온 지나친 해석이었다. 지금은 국기 경례는 허용한다. 절하다는 의미를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오늘 문제가 되는 황교안 당 대표가 조계사 대웅전에서 서서 절하는 반배(半拜)로 돌아가 보자.
Q 1. 한국 전통 종교 문화에서의 절과 기독교의 예배가 같은가?
다르고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절하다를 예배로 보면 사당 제사나 예불은 우상숭배가 된다. 기도 행위가 들어가면 예배 행위가 된다. 사찰에서 예불하는 승려가 부처에게 복을 빌거나 그 부처의 힘을 빌기를 원한다면 예배 행위이다. 그러나 승려에게 물어보라. 그 절하는 행위가 어떤 뜻인지.
 
Q 2. 불교에서 불상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엎드려 절하는 것이 신을 예배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예스 & 노이다. 원래 불상에 절하는 행위는 내 욕망을 멸하고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 행위였다. 불상을 섬기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굽히고 치고 엎드림을 반복함으로써 정신에 깨침을 얻는 행위였다. 앞서 깨친 부처에 대한 인사와 공경의 표시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독교인이 교회에 와서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십자가를 보며 복만 빌 수 있듯이, 민간 신앙으로서의 예불 행위는 기복 기도로 변질되었다.
 
Q 3. 황 대표가 서서 (엎드려서가 아니라) 절을 했다.이것이 예배 행위로서의 절인가? 아니면 존경과 예의의 표시인 절인가?
불상에 대한 절이란 외적 행위를 출 20장 5절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그러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지난 300년 이상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등)은 중국과 한국에서 조상 신위 앞이나 무덤에서 절하는 제사가 우상숭배인가 아닌가를 논의해 왔다. 핵심은 조상신에 대한 복을 비는 기도 행위에 있었다. 조상 신이 살아 있는 후손의 길흉에 관여하며 그들의 안위가 후손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동기 상응(同氣 相應) 논리를 거부했다.
우리는 황 대표가 조계사에서 복을 비는 기도나 신을 예배하는 행위로서 서서 절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민간불교적 신앙을 가지고 했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서 정치적 행위 부분은 논외로 한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 본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
겉으로 절하나 속으로 절하지 않는 한국 교회 신앙을 문제 삼자.
교회 마당만 밟고, 정의와 사랑을 잊은 한국 교회여, 회칠한 무덤이여!

 

'옥 교수의 글 > 단어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 7:1 비판하지 말라?  (0) 2024.03.03
여호와, 야훼, 야웨?  (0) 2021.04.12
賊反荷杖  (0) 2021.04.11
福 ברך(바라크)  (0) 2021.04.11
영적 예배 = 마땅히 해야 할 일상의 섬김  (0) 2019.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