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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문서, 성서, 번역

1984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을 만든 사람은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 (1984) 교정 실무자는

1866년 토마스를 처형한 군인의 조카로 숭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0년대 말 평양 장로회신학교 구약학 교수 레널즈(W. Reynolds) 선교사의 번역 비서로 지낸 이영태(李榮泰)였다.


1. 성서공회 총무 민영진, "북한성경제작 실무자 이영태(李榮泰)," <성서한국> 48-3 (2002 가을)에서

내가 북한 성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985년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친구로부터 그 성경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 무렵에 이미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들은 북한 성경을 소개하고 다루면서 그 가치를 깎아 내리고 있었다. 남한의 여러 번역을 참고하여 엉터리로 만들어낸 성경, 자기들에게도 성경이 있고,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세계에 선전하려고 급조하여 만든 성경이라고, 가치를 폄하하면서 보도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니, 북한 성경은 독자적인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남한에서 1977년에 개신교와 카톨릭이 우리의 현대어로 쉽게 새로 번역한 공동번역성서를 북한의 국문법과 정서법에 따라 다시 고친 교정본이었지만, 아주 정교하게 정성을 들여 다듬은 훌륭한 교정이다. 본문을 교정한 여러 곳에서 이 일을 맡은 실무자의 성실한 기독교 신앙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도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서 북한 당국이 기피하는 어휘를 일일이 추려내어 다른 말로 바꾸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우리말 문법에 익숙한 국어학자라는 것도 그 교정 내용과 본문을 다루는 솜씨에서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작업을 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 줄곧 혼자서 교정 작업을 한 것 같은 통일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교정이다. 이런 점에 관해서는 이미 19893월에 월간 기독교사상에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북한성경이 남한의 공동번역 성서의 평양교정본임을 밝힌 바 있다. 

20027월의 남북교회지도자 8차 모임에서 북한의 강영섭 목사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주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주 오랜 숙제를 풀 수가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 평양 교정본을 작업한 사람을 드디어 알아냈다. 

위원장님, 어제 제가 발표한 특강 들으시고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특히 일본에 있는 교인들이 제 강연 제목을 미리 보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북한 성경이 자신들의 번역인줄 알고 있는데, 남한 성경을 교정한 것이라고 하면, 혹시 북한에서 오신 분들께서 불편해 하시면 어떻게 할 거냐고, 저더러 제목을 좀 달리 붙일 걸 그랬다고, 공연히 북한 대표들에게 불쾌감을 줄 것이 뭐냐고 하면서 걱정했습니다.” 

아니요. 목사님께서 사실대로 잘 연구하여서 발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한 가지 더 여쭤볼 게 있습니다. 1990년에 도쿄 한국 YMCA에서 1차 남북교회지도자 모임이 있었을 때 제가 북한 대표로 오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이셨던 고기준 목사님께 여쭌 일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발행한 공동번역 성서를 북한에서 교정한 실무자들이 누구였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 때 고기준 목사님은 다만 몇 몇 사람을 데리고 작업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북한 성경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로는, 그 실무자들이 국어학자들만도 아니고 성서학자들만도 아닌 이 둘을 겸비한 이들, 곧 성서번역이나 교정에 경험이 있는 이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목사님께서 잘 보신 것 같습니다. ‘이용태란 분이 이 작업을 하셨어요. 그는 선교사 리눌서의 비서였습니다.” 

.......? 이눌서요? ‘이눌서(李訥瑞)’라고 하면 말년에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교수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레놀즈(W. D. Reynolds)인데요?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그의 성경 번역이나 개정 작업을 돕던 한국인 서기가 아직도 살아 있어서 공화국(共和國) 성경 교정 작업을 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민 목사님께서도 리눌서를 알고 계시는 군요.” 

알고말고요.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 중에서는 40년 이상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선교사 활동을 한 분이지요.” 

그의 입에서 리눌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에 대한 신뢰감이 한층 더 들었다. 이눌서 선교사는 1892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1937년에 귀국할 때까지 45년 머물면서, 1911년에 나온 구역은 물론 1938년에 나온 개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성경 번역에 헌신한 장로교 선교사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우리말 최초의 聖經事典을 편집하여 출판한 사람이다. 우리말도 잘 했고, 우리말 문장도 수려했다. 내가 이눌서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강영섭 위원장도 놀라는 것 같았다. 다시 물었다. 

이용태입니까 이영태입니까?” 

이용태입니다.” 

이제 제 오랜 숙제가 풀렸습니다. 이눌서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서기였던 분이라면 능히 성경을 개정하거나 교정을 할 자격이 충분하지요.”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북한에도 그런 번역자를 남겨 두시어 성경을 번역하게 하였나,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동안에는 성경을 번역한 선배들이나 동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북한에서 북한성경을 펴낸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막연히 그 번역에 참여한 이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이제는 구체적인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르겠다. 

더 놀라운 일은 일본에서 귀국한 그 다음에 생겼다. 서재에 들려, 우리말 성서번역사 자료들을 들추다가 이영태(李榮泰)’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이눌서 선교사의 조수 이름이, 곽안전 교수의 한국교회사에는 이영태(李榮泰)’라고 되어 있고, 이덕주 교수의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에는 이영대혹은 이영태라고 되어 있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자서전에는 그의 이름이 Lee Young Tai라고 되어 있다. 1866년에 제너럴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진입하려다가 대동강변에서 우리 쪽 방어군에게 순교(殉敎)를 당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목사, 그에게 성경을 받고 기독교인이 된 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조카가 기독교인이 되어 훗날 이눌서(李訥瑞) 선교사의 조수(助手)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이영태인데, 이눌서 선교사와 함께 일하면서 성경의 우리말 번역을 도왔던 그가 북한에 살아 있어서 공동번역 성서를 교정한 바로 그 사람이라니!


2. 나의 추가 연구

1) 토마스를 살해한 군인 전 씨와 이영태

여러 자료를 읽고 새로운 자료를 찾아 대조한 결과 잠정적으로 다음 인물을 186692일 평양 대동강 쑥섬(봉래도)에서 선교사 토마스 목사를 최후에 죽인 인물로 지목하고자 한다. 같은 인물이지만 그 친족 관계가 자료에 따라 달라 두 안으로 제시한다. 

A: 그는 당시 평양 군인 전 씨로, 이재풍 목사의 부인 전 씨의 삼촌이었다. [자료 1]

(이재풍 목사 부인이 전씨의 조카)

 자료 1에는 그 군인이 이재풍 목사의 사촌처남(처의 사촌)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처삼촌의 오기로 보인다. 9개월 후에 출판된 좀 더 정리된 자료 3에서 이를 수정하여 이재풍 목사의 아내가 그 군인의 조카라고 했다.

 李在豊 목사의 차남 李永泰(= 토마스를 죽인 전 씨의 조카의 아들)1926년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자료 2], 얼마 후 레이놀즈 선교사(1924년부터 평양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구약 개역 번역에 참여함)의 번역 조사로 일했다. 그는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 번역자였다.[자료 4]

그 동안 이영태의 이름을 혹 이대영으로 잘못 표기하기도 했고, 한자명도 李榮泰로 잘못 표기했으나, 그 형 永漢(숭실대 졸업)과 같이 자 돌림으로 永泰가 맞다. [근거: 자료 2] 또 그를 평양신학교 졸업자로 잘못 쓴 글도 있으나 숭실대만 나왔다. [자료 3]

무엇보다 토마스를 살해한 박춘권의 조카로 쓰거나, 살해한 군인의 조카라고 쓴 글이 많은데, 이는 F. Hamilton의 글을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다. 해밀턴 선교사의 글에는 군인의 조카가 이영태의 어머니였다고 되어 있다.[자료 3]

 이상의 근거 자료는 다음과 같다.

자료 1. 오문환, “平壤洋亂閑話 (3),” 기독신보, 19261222.

자료 2: 銀峰, “故李在豊牧師 葬禮,” 기독신보, 1927420.

자료 3. Floyd E. Hamilton,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Korea Mission Field (Sept. 1927): 185.

자료 4. 민영진, "북한성경제작 실무자 이영태(李榮泰)," <성서한국> 48-3 (2002 가을).

오문환은 군인 전씨의 이름을 알았으나(<도마스목사전> 부록, 17), 그의 성만 밝히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A안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B안: 그는 당시 평양 군인 전 씨로, 이재풍 목사 부인의 할아버지의 매형이었다. [자료 5]

그러나 오문환은 1932년 토마스를 소개하는 다음 영문 논문을 왕립협회조선지부에서 발표하면서, 전씨의 처남의 증손자가 이재풍 목사의 두 아들이라고 수정했다.

자료 5. Moon Whan Oh, “The Two Visits of the Rev. R. J. Thomas to Korea,”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XXII (Seoul: 1933): 121.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결론

1926년 오문환은 도마스 전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통영장로교회에서 목회하던 이재풍 목사로부터 처 삼촌 전 씨가 토마스를 죽인 군인이라는 증언을 들었다. 오문환은 그 이름까지 알았지만, 죽은 자의 명예와 후손을 위해서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32년 영문 논문을 쓸 때, 그는 그 관계를 수정하여, 이재풍 목사의 두 아들이자 자신의 숭실대 동창인 이영한과 이영태의 증조할아버지의 매형이 처형한 군인이라고 했다. 이 경우 이영태의 모친과는 친족 관계가 멀어지기 때문에, 친구인 이영한과 후배인 이영태의 명예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재풍 목사가 전해 준 1926년 증언에 기초한 글은 A안을 지지한다.

어느 쪽이든 군민이 승박한 토마스를 타살한 것으로 나오는 <고종실록>과 달리, 이재풍의 증언 이후 오문환은 군인 전 씨가 성경을 전하려는 토마스를 칼로 찔러 처형했고, 죽기 전에 받은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 후회하며 자녀들에게 그 성경을 준 것으로 서술했다. <도마스목사전>이 그러했다. 이 경우 토마스의 최후가 좀 더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순교자, 선교사의 모습을 띄게 된다.

우리는 도마스牧師를 殺害한 사람의 姓名도 알 수가 잇스며 ᄯᅩ한 殺害光景을 들어 알엇다. … 義로운 主의 使者를 慘酷하게 죽인 兵卒의게도 良心은 잇섯는지라 殺害한 後 其聖經을 밧아가지고 집에 도라 가셔는 自己家族의게 自己마음의 압흠을 말하엿다. “오날 내가 西洋사람을 죽이는 中에 한 사람 죽인 것은 내가 只今 生覺할사록 마음 가온대 異常한 感이 잇다. 내가 그를 ᄶᅵ르려고 할 ᄯᅢ에 그는 두손을 마조 잡고 머리를 숙여 무삼 말을 한 後 紅布衣의 冊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의게 밧으라고 勸하엿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 冊을 밧지 안을 수가 업서서 밧아가지고 왓노라.” 그가 自己家族의게 한 告白의 一節이다.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평양: 도마스목사순교기념회, 1928), 부록, 17.)

해밀턴 자료대로 A안이 사실이라면, 이영태의 어머니의 삼촌이 토마스를 죽인 것이므로 (= 군인 전 씨의 조카의 아들이 이영태), 이후 이영태가 1920-30년대 개역 번역, 1980년대 초 공동번역 성서 평양교정본 작업을 한 것은 토마스가 대동강과 평양에서 1866년 성경을 반포한 권서 작업과 연결된다. 그 경우 1866년 병인년 평양 양란이 1980년대 평양본 공동번역 성서와 연결되어, 120년의 역사가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150년 전 洋亂이 성경을 통해 오늘과 만난다.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