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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교회, 선교, 신학에 대한 단상

한국교회사에서 개교회 창립일 기준이 있는가?

한국교회사에서 개교회 창립일 기준 문제

이것은 앞으로 논문으로 써야 할 주제이고 교회사학회가 토론해서 일정 기준을 정해야 할 사안이지만, 내가 여러 차례 이 문제를 거론했으므로, 일단 다음과 같이 내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현재 한국기독교사연구소나 학회, 혹은 교단이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지 않으므로, 각 교단이나 개 교회가 그동안 고무줄처럼 자신들의 창립일을 바꾸거나 앞당겨 왔다. 어떤 도시에서 자신들의 교회가 최초의 교회라는 경쟁 의식이 앞서서 과거 오랫동안 지켜오던 창립일을 수정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사 학회나 교단 차원에서 교회 창립일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서 교회사 서술에 일관성을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 해방 이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대다수였으므로 일단 두 교회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1) 전제 1 교회 설립의 기준: 지역성 + 공동체성(한국인 신자의 형성) + 예배(정기 예배와 말씀의 선포) + 성례 + (조직)

한 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고, 두세 명의 한국인 학습인이과 초신자가 나와서 신자가 존재하고, 그들이 모여서 정기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OO교회가 창립되는 일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사건이다. 1879년 의주 청년 4명이 세례를 받고 만주와 의주에 있었다고 해서 우리는 의주장로교회가 창립되었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특히 선교사만으로도 한국의 어떤 로칼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 도시에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만 있으면 그 감리회 교회(Church)의 한국 선교회(Mission)나 선교지부(mission station)가 시작된 것이다. 어떤 나라나 도시에 선교가 시작된 것이지, 한국인 개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니다. 선교사들의 예배에 한국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단계도 아직 한국인 개교회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역성 (한국 내, 한국 전체 아닌 특정 도시나 마을)+ 두세 명의 한국인 신자들의 공동체 형성 + (예배처소를 정하고) 최소한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 + 나아가 세례와 성찬이 행해지는 성례의 존재라는 4요소가 필요하다. 

두세 명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그곳에 주님이 계시는데, 이를 교회 창립으로 보는 것은 회중교회 원리이다. 교단마다 교회 설립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성공회의 경우도 1890년 주교가 서울에 파송된 것은 한국 전체 성공회의 시작이지, 어떤 개교회의 창립이 아니다. 감리교도 스크랜턴과 아펜젤러가 1885년 7월까지 서울에 도착했고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은 미국 북감리회 한국선교회(mission) 소속 선교사들의 예배와 성찬이지 아직 어떤 한국 로칼 처치가 창립된 것은 아니었다.

지역 교회가 성립되어도 조직 이전에는 방문하는 선교사 목사에 의해 세례와 성례가 집행되는데, 이 경우에도 성례가 이루어졌으므로 이미 교회는 창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교회의 표지로 말씀 선포와 성례(세례와 성찬)의 집행으로 보는데, 이는 칼뱅의 견해로 주로 장로교회 계통의 입장이다. 그러나 감리교회 개교회 설립도 교인들의 존재 + 정기 예배 + 성례의 시행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감리교회가 조직을 강조하므로 교회-계삭회-지방회-매년회(연회) 조직에서 교회의 성립은 이러한 몇 가지 요소 외에 조직 차원이 들어가야 개 교회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2) 전제 2 해방 이전에 지키던 창립일 존중 

특별한 오류나 새로운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해방 이전이나 한국교회 100주년이던 1984년 이전에 지켜오던 창립일은 존중되어야 하고 굳이 수정할 필요가 없다.  단 그 창립일에 대한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서울 남대문교회의 경우, 1970년대까지 교회가 장로교회로 '조직'된 1909년 11월 21일을 창립일로 지켜왔다. 그런데 1979년부터 수정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1885년 6월 21일 선교사들만의 예배를 억지로 창립일로 보고 있다. 그날 처음 서울 거주 선교사들만의 예배로 시작된 교회는 유니언교회로 따로 창립, 발전했다. 지역성, 공동체성, 정기 예배 삼 요소를 남대문교회에 적용하면, 언제 남대문 부근에 예배처소가 마련되었는지, 언제부터 정기 주일 예배를 드렸는지, 그들이 누구였는지(곧 구리개 제중원과 연관된 홍문동교회와 병원 내 채플에 참석하던 교인들이 별도로 남대문 부근에서 회집하는 과정)를 밝혀서 서술해야 한다. 해방 이전까지 남대문교회는 스스로 혹은 여러 선교사들의 기록이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서 1885년이나 1887년이 아니라, 1904년 남대문밖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된 이후 그 구내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1907년 교회로 '창립'했으며, 1909년 11월 21일 정규 장로교회로 '조직'되었다고 서술해 왔다.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한국교회사>, 222-228.)

(3) 장로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1928)를 보면 "OO교회가 성립되다"라고 서술할 떄, 선시에(일찍) 신자가 된 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들이 모여서 예배당을 마련하거나 건축하고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곧 예배당 마련이나 설립을 교회 설립과 동일시한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한국 장로교회가 조직을 우선하지 않고 회중교회에 가까운 네비어스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전도하는 자전 후에 자급으로 스스로 예배당을 마련할 정도가 되어야 교회가 성립되었다고 본 것이다. 예배당을 마련하면 영수가 매주 설교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지역 담당 조사가 방문하여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 학습문답을 하여 세례 지원자를 선정하고, 1년에 한 번 정도 약 40-50개 정도의 교회가 있는 지역(나중에 시찰로 발전) 담당 선교사가 방문하여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행하였으므로, 1907년 노회 조직 이전에 자치와 치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87년 새문안교회처럼 세례교인 14명으로 2명의 장로 + 선교사 목사로 정식 장로교회로 '조직'된 경우는 한국 전체를 아우러는 동시에 지역 교회로서 창립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예외적인 경우였다.

장로교회 치리회 조직은 당회-시찰회-노회-총회로 올라가는데, 1887년 새문안교회 '당회'가 조직된 것은 서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한국 장로교회 개교회 창립일은 목사나 장로가 없이도 가능하다고 보았고, 회중교회 형식의 창립일을 도입하여 서술해 왔다. 다만 남대문교회의 경우는 1907년 11월 21일 장로와 교인들로 당회 목사(언더우드)가 참여하면서 조직되었기에 이를 창립일로 보았다.

해방 이전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 소수 교파에도 회중교회 식의 기준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4) 감리교회

감리교회는 감독(bishop)의 다스림 하에 있다는 점에서 조직적으로 성공회(bishop 주교가 다스림)와 장로교회(여러 치리회가 다스림) 중간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16년 12월 웰치(Herbert Welch) 감독이 한국에 부임하고 서울을 거주지로 정하기 이전까지 한국 안에는 감독이 없었다. 1885-1904년에는 중국에 있는 북감리회 선교사 감독이 방문하여 치리했고, 1905-1916년은 일본 거주 해리스 감독이 치리했다. 한국에는 처음에는 선교회 감리사가 이어서 감리사가 임명되었다.   

정동제일교회를 보자. 강매, <정동교회 30년사>(1915), 9쪽이 서술하듯이, 조직면에서 보면

또 [최병헌 목사는] 가로되 1889년 12월 7일에 경성에서 미감리교가 처음으로 조직되다 하였고, 1890년 1월 25일에 첫번 계삭회를 개회하고, 1890년 2월 25일에 장유회와 및 지방회를 처음으로 개회하고, 1905년에 조선선교회가 설립되고, 1908년에 조선매년회가 설입되다 하였더라. 

강매의 서술에는 일부 연도에 오류가 있지만, 담임목사가 주재하는 한 해 네 차례 모임의 의미의 "계삭회(季朔會)" 조직--장로교회의 당회와 유사--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그 관점과 서술은 옳다. 계삭회들이 모여 지방회--장로교회의 노회--가 되고 지방회가 모여 매년회(연회)--장로회의 총회와 유사--가 된다. 위 글에서 최병헌과 강매는 1889년 12월 7일 정동제일교회가 처음으로 조직되었다고 썼다.

1885년 이후 한국 감리교 선교가 진행되고 선교회 연회(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C)는 매년 모이고 있었지만, 개교회로서의 정동제일교회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이 문제는 내 책 <다시 쓰는 초대한국교회사>에서 한 장으로 거론했다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에 세워졌을까?" pp.233-247.)

1888년 9월 이후 1년 간 처음으로 "부분적으로 세 개의 속회(society)가 조직되었다. 서울에 있는 것은 내[아펜젤러]가 돌보고 있으며, 하나는 지방 전도인에 의해서, 나머지 하나는 정기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아펜젤러가 보고했다.

(1889년 연례보고서) 즉 서울 속회, 평양 속회, 제물포 속회는 1888년 조직되었으나, 정식 조직은 서울 뿐이었다. 1888년 11월 25일 처음으로 한국인 local preacher(본처전도사) 2명(평양의 김창식과 서울의 최병헌)을 임명했는데, 따라서 그 이전에는 정동제일교회 외에 다른 지역 감리교회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1890년 말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한국에는 감리교회가 한 개만 있었다. 이 점에서 인천내리교회가 1885년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천에 언제부터 속회가 조직되고 본처전도인이 임명되는지 밝혀보기 바란다.

"현재 정기적으로 조직된 속회(society가 하나 있다. 1년이 넘도록 우리는 내 사택의 비어 있는 방에서 모였고, 지난 여름과 가을에는 존스 형제 사택에서 모였다. 11월 우리는 병원 부지가 있는 거리 근처의 빈 건물로 옮겼다. 이곳에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당분간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선교부의 정기 월례회가 12월에 열렸는데, 한국에서 처음으로 계삭회를 조직했다. 이것은 앤드류 감독의 권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정규적이고 공식적으로 조직된 1개의 교회 혹은 속회를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교회법을 따라 모든 사업을 처리할 수 있다." (이만열 편, <아펜젤러> (연세대출판부, 1985), p. 337. 옥성득의 번역을 일부 수정함.)

1895년 9월 9일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당 정초식 때에도 그 머릿돌에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했다. 머릿돌에 짧게 쓸 때는 가장 중요한 교회의 역사를 쓴다.

이 [정동제일] 교회는 1889년 12월 7일 계삭회(Quarterly Conference)를 구성함으로써 조직되었다. 설교와 기도회는 그 2년 전에 시작되었다. 

벽돌 양옥으로 큰 교회당을 지으면서 그 머릿돌에 그 교회가 (1) 언제 예배를 시작했는지--1887년 벧엘교회당에서 기도회와 설교와 예배를 시작함으로써 '정동' 제일교회가 시작된 것을 말함--그리고 (2) 언제 계삭회를 조직하고 조직 교회가 되었는지--1889년 12월 7일--를 밝혔다.

1984년 이후 정동제일교회 역사서들은 이 점을 애써 무시한다. 1887년 10월 9일 상동 벧엘예배당에서 교회 시작, 1888년 속회 조직, 1889년 12월 7일 계삭회 조직으로 정식 조직 교회가 되었다고 왜 쓰지 못할까. (참고로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은 1897년 12월 16일 헌당되었다.) 

지난 30년간 정동제일교회는 장로교회 영향인지, 새문안교회와의 경쟁 의식 때문인지, 회중교회 식으로 감리교회 설립을 보았고, 심지어 최근에는 선교사(아펜젤러)만의 가정 예배를 정동제일교회 창립으로 보아 기존 연대를 수정하고 창립년도를 1885년으로 올렸다. 역사의식 부재 때문이다. 새문안교회처럼 교회 '조직'일을 기준으로 하면 새문안은 1887년 9월 27일, 정동제일은 1889년 12월 7일이 교회 창립일이다. 정동제일교회가 굳이 창립일을 올리려면 정초식 머릿돌에서 밝힌 1889년 12월에서 2년 전, 곧 1887년 10월 9일부터 5개월 간(1888년 3월 정부의 예배 금지령으로 폐쇄) 지속된 남대문 부근 상동의 벧엘 예배처소 예배(말씀 선포, 세례식, 성찬식, 기도회가 이루어 짐)를 그 창립으로 보면 된다.    

1897년 헌당식 후 첫번 성탄절 때 정동제일교회 강대상과 성탄 장식, 이미 오르간이 있었으나 교인 의자는 없었다. 예배 때는 중간에 병풍을 설치하여 남녀석을 분리하다가 곧 휘장으로 분리했다.

글을 맺으며

새문안은 1887년 9월 27일, 정동제일은 1887년 10월 6일, 인천내리는 1890년 안골(내리)에 6칸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으로써, 남대문은 남대문밖 세브란스병원 안에 1907년에 설립/창립되었다. 조직으로 보면 정동제일은 1889년 12월 7일 계삭회 조직, 남대문교회는 1909년 11월 21일 당회 조직으로 그 창립일을 잡아야 한다.

여러 교회는 이제 교회 창립일에 대해 열기를 식히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1차 자료가 말하는 대로, 해방 이전 창립 기념일을 지켜온 대로 교회 설립일을 제자리로 옮겨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당을 마련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감격적이었다. 그 날을 제대로 밝히는 작업은 중요하다. 교회가 쇠퇴하고 사회로부터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비판을 받는 현재 시점에서, 이제는 연대를 올려 최초성을 자랑하던 허풍, 과시, 거품을 빼고, 정식 교회 조직이면 조직, 정규 예배면 예배, 한국인들의 말씀 선포와 성례를 기준으로 하면 예배를 기준으로 정확한 창립일을 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