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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나는 1984년 가을 아펜젤러 자료를 번역하면서 한국교회사 공부를 시작했다. 1985년 1월 백낙준 총장님이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연대에서 열렸을 때, 나는 한 구석에서 거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경직 목사님이 바울의 말씀으로 인생의 경주와 면류관에 대해 설교했다. 한국교회사 학자 1세대가 사라졌다. 2세대 없이, 3세대 민경배 교수가 한국교회사를 호령하던 때였다. ​나는 1985년 6월에 교보문고에서 백낙준, , 연세대출판부, 1973년 초판을 구입했다. 1929년 영문판의 번역이었다. 구입 직후 책 뒤에 "1885년에 入國한 Appenzeller와 Underwood를 공부하면서 (1985. 6. 26. 교보문고에서)"라고 쓰고 한문으로 내 이름을 썼다. 아펜젤러 공부를 1차로 끝내고 한글 번역을 수정할..
1977 공동번역 구약 출판: 내용의 동등성 이론과 문익환 번역이란 무엇인가? Nida의 dynamic equivalence theory에 따라 공동 번역은 직역이 아닌 뜻을 중시하는 의역을 했다. 지혜서들을 번역한 문익환 목사가 번역한 예들을 보자.​욥기 8: 7개역: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공동번역: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잠언 12: 9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먹을 것 없는 양반보다는 일거리가 있는 상놈이 낫다.​전도서 7: 10개역: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공동번역: 이런 말을 하지 마라. "지나간 세월이 지금보다 좋았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1969 구역 신약전서 출판 개역 성경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한 이유다음은 1911년(실제로는 1906년)에 출판한 구역(舊譯) 신약전서를 한글 맞춤법으로만 고치고 그대로 출판한 (초판 1969년, 6판 1979년)이다. ​1939년에 성경 개역(改譯)이 나오고 1954년에 한글 맞춤법에 따라 고친 개역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역 이전의 구역을 읽었던 나이 든 구세대는 어릴 때 읽던 구역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대한성서공회는 이들 노 세대를 위해서 세로쓰기로 구역 신약전서를 출판해 주었다. 60년 전 번역이 6판을 거듭해 79년에도 나왔다. ​마찬가지로, 1938년에 완성된 개역을 8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교회 구세대의 다수가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바로 어릴 때 읽고 암송하고 묵상했던 "내 마음의 노래가 되었던"..
1971 거제도 공동체병원 프로젝트 WCC 기독교 의료사업단의 첫 연구 사업으로 한국에서 거제도 프로젝트 시행 내가 자란 거제도 하청면에 선교 병원이 있었다. 그 실전리 병원 언덕에서 보면 칠천도가 좁은 바다 건너 바로 앞에 있고 멀리 진해나 마산이 바라보였다. 지금은 그 언덕 아래 칠천도와 연결된 다리가 있다.어릴 때 간혹 하청교회(장로회 통합측: 거제도는 호주장로회 지역이었으나 고신보다 통합측 교회가 많았다)에 백인 선교사가 와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거제도는 원래 호주장로회 선교회 지역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호주장로회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자료를 보니, WCC 기독교의료사업단의 연구사업이었고, 처음 파송된 선교사는 미국 연합장로회의 시블리(Jean Sibley) 의사였다. 이때부터 등장한 개념이 "Community ..
2018 장로교회의 실상 장로교인은 대부분 한국과 미국에 있다. 한국에 550만, 북미에 약 200만, 유럽과 오세아니아 100만, 아시아 아프리카에 300만 정도, 합계 1,200만 정도가 아닐까 한다. 5년 전에 1,500만이란 통계가 있었는데 매년 3% 정도 감소하므로 1,200만으로 잡았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0.5% 정도가 장로교인이라고 보면 된다. 미미한 존재요 극소수다. 미국장로교회(PCUSA)는 1986년 약 3백만 신도였으나, 30년 후인 2016년 약 1백 50만 명, 절반으로 줄었다. 한국 장로교회들은 1986년 약 400만 명이라고 자랑하며 30년 후에는 1000만명이 될 것처럼 허세를 부렸으나, 2016년에는 2015년에 비해 5% 정도 감소를 보이면서 매년 감소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잡아도 600만 ..
1919 제암리 학살사건 성경을 읽은 결과: "어떤 학살 사건" (사이토 이사무, 1919년) 아아 조국이 망했는데, 당국이 무단과 폭력을 사용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불복종하며 자유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 기독교인들이 모여 '소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으랴. 아,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교회, 그 날은 수난 주간 화요일이었다. 齋藤勇, "어느 살육 사건," 小川圭治 지명관 편 (김윤옥 손규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0), 727-729. 원문은 1919. 5. 22일자에 있음. 삼일운동을 본 프레드릭 맥켄지 신문 기자는 말했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수용했다. 미국에서 온 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으로 청결하게 되고, ‘안방’에 ..
1919 만세 반석 열리니 찬송가 한 장으로 만세 삼창 1919년 3월 8일은 토요일이었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미리 전달 받은 독립선언문이 뿌려지고 800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다. 역과 주요 지역마다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깔렸다. "만세"를 외치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역의 확성기에서는 이 명령을 계속 반복해서 내보냈다. 삼엄한 경계 속에 토요일 밤이 찾아 왔다. 3월 9일 이튿날 주일 아침 한국인 목사들이 모두 구금된 상태에서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대구의 브루엔 목사는 예배 때 어떤 찬송을 부를까 잠시 고민했다. 침울한 교인들을 격려하되 관심을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찬송을 찾았다. "십자가 군병들아"가 우선 떠올랐다. 그러나 부적절해 보였다. 이어 "Rock of Age" (만세 반석..
1919 평양숭실의 모우리 교수의 고난 삼일운동과 모우리 우리가 기억하는 모우리 Rev. Eli Miller Mowry(1880-1971) 선교사의 모습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숭실대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경찰에 쫓기다가 10여 명이 교수인 모우리 사택으로 숨어들자, 이들을 숨겨준 죄목으로 4월 10일 평양 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을 받은 후 감옥에 갈 때의 다음 모습이다. 1919년 4월 10일 평양법원에서 1심 재판 후 방갓을 쓴 모우리 목사의 모습. 19일에 6개월 징역형 선고를 받기 전. 174 cm였으니 그렇게 큰 키는 아니었으나 마른 체형이라 크게 보였다. 평양 경찰서는 시위가 어느 정도 진정된 4월 2-3일 평양 시내 선교사 사택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가택 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모우리 사택에서도 몇 명의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