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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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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2. 12 “자기 생활에 철저하고 깨끗한 삶”을 살고 이완용이 죽다 1926년 2월 12일 이완용이 죽자당시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을 위한 라는 잡지에 ‘東邦生’의 이름으로 “李完用侯の死”(본문 제목은 “逝ける李完用侯”)라는 추도문이 실렸다. (1926년 3월, 제220호, 67-69.) 이완용이 을사조약과 일한병합에 나선 경위를 설명하면서, 배일파의 우두머리였던 친미개화파인 이완용이 친일파로 돌아서게 되자 일본인들조차 놀랐다고 쓰고 있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친하게 지낸 일본인 역시 없었다. 일본인 관료들에게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은 자로만 알려졌고 능력과 신의가 있는 인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재산이 많지만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돈을 모으고 잘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자기가 죽으면 자기 일가를 보호해 줄 것은 ..
1963 김재준 "한국교회의 민주참여와 사명" 1963 김재준 "한국교회의 민주참여와 사명"4.19 후 김재준 목사가 평가한 한국 교회 이승만 정권에서 교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냉소적,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3.15 부정 선거에 대해서도 침묵하며 자유당의 지시대로 순종했다. 충견도 많았다. 한 마디로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다. 4.19 이후 교회는 1) 교회 답게, 2) 정의에 용감하며, 3) 역사적 사명에 철저해야 하겠다. 4)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제도의 개혁에서보다도 인간 자체의 개혁과 그에 따르는 도의적인 갱신에 있다고 본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이 낡고 간사하고 욕심장이고 보면 얼마든지 그것을 악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금후의 교회는 항구한 '야당적'인 입장에서 십자가를 각오한 '의의..
1971 김한식(金漢植) 한사랑선교회 설립 김한식(金漢植, 1946-) 사단법인 한사랑선교회 설립1946 전남 고흥 출생 (현 72세)1970(?) 서울大 음대 작곡과 졸업. ​1971 한사랑선교회 설립. 이후 20년간 캠퍼스선교, 운동권의 필독서 200여 권을 독파해 공산주의 이론의 허구를 깨부수는 이론가로 이름을 날림.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세례를 주어 이단 시비 일어남​1986. 5. 문익환 서울대 집회 반대 (이동수 분신) 1986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경 서울대 오월제 행사 가운데 문익환 목사 연설 중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하여 사망, 문 목사 구속됨. 분신한 이동수는 내가 있는 곳 15미터 정도 앞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김한식은 문익환과 운동권을 사탄의 세력이라며 연단 가까이에서 한사랑선교회 학생들과 함께 "십자..
1910. 3. 26 안중근 순국 3월에 생각나는 사람 토마스 (多默) 안중근 장군 1909. 10. 26 동양평화를 위해 이또 히로부미 하얼빈 역에서 사살 1910. 2. 14 재판정에서 사형 판결 1910. 3. 26 사형 순국 이틀 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 "우리는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배려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헤어지게 되었소. 그러나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께 효도를 다 하시오. 두 동생과 화목하며, 자식의 교육에 힘쓰길 바라오.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세에 영원한 복락을 희망할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결심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하느님께 바치어 장래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
1994 탁명환 목사 살해됨 [2월에 생각나는 사람] 탁명환 목사 (1937. 7. 8 - 1994년 2월 19일)국제종교문화연구소 소장 http://kcm.kr/dic_view.php?nid=40630 탁명환 소장은 숨지기 한 달 전, 1994년에 쓴 그의 새해 인사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부족한 저를 쓰시려는지 알 수 없으나 사명 다 할 때까지 이 생명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며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살았던 그는 1994년 2월 19일 새벽 0시 10분 한 이단자의 칼에 의해 살해되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그 목숨을 버리면 ;;;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1965 대천덕 신부 예수원 설립 [2월에 생각나는 사람]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 Reuben Archer Torrey, III1918년 1월 19일, 중국 산동성 제남 출생 1928∼1932 북중국 미국인학교(North China American School) 1933∼1934 한국 평양 외국인학교 (Pyongyang Foreign School) 1934∼1935 중국 연경대학(Yenching University) 1935∼1939 데이비슨 대학(Davidson College; 남장로회) 학사 1939∼1941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y Seminary) 1940∼1942 유에스 엔지니어(U.S. Engineers) 근무 1941∼1942 철강회사(Structural Iron Work) 근무 1942∼1947 단속..
詩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詩(문학과 음악)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1.유교 五經의 시작은 공자가 편찬한 옛 시들로 이루어 진 詩經이다. 공자는 311편(305편)의 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노송 경편’에 등장하는 ‘사무사’ 구절을 인용하여 “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역시 공자는 술이불찬(述而不贊)의 자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로 낙빈 속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인간성의 가치를 믿고 사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와 음악의 대가였다.​자공이 말하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께서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되 [도를] 즐거워하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詩經에서 ‘곧 잘라 놓은 듯,..
1953 방지일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 중 1953년 1월 19일 귀국하지 않고 순교의 각오로 중국 선교에 임하고 있는 방지일 목사 가족에 대한 보도.그는 이 기사 이후에도 4년 더 공산국 중국에 머물며 선교했다. 중국 최후의 외국인 선교사였다. 이것이 알려져 북한으로 추방되지 않고 남한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기사를 보면 195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 군함을 보내어 방목사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방 목사가 고별 인사를 하자 교인들이 울기 시작했고, 방목사는 차마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남기로 작정했다. 남한에서는 그가 조난 당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소식이 전해져서 이 기사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