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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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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詩(문학과 음악)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1.유교 五經의 시작은 공자가 편찬한 옛 시들로 이루어 진 詩經이다. 공자는 311편(305편)의 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노송 경편’에 등장하는 ‘사무사’ 구절을 인용하여 “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역시 공자는 술이불찬(述而不贊)의 자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로 낙빈 속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인간성의 가치를 믿고 사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와 음악의 대가였다.​자공이 말하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께서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되 [도를] 즐거워하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詩經에서 ‘곧 잘라 놓은 듯,..
1953 방지일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 중 1953년 1월 19일 귀국하지 않고 순교의 각오로 중국 선교에 임하고 있는 방지일 목사 가족에 대한 보도.그는 이 기사 이후에도 4년 더 공산국 중국에 머물며 선교했다. 중국 최후의 외국인 선교사였다. 이것이 알려져 북한으로 추방되지 않고 남한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기사를 보면 195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 군함을 보내어 방목사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방 목사가 고별 인사를 하자 교인들이 울기 시작했고, 방목사는 차마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남기로 작정했다. 남한에서는 그가 조난 당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소식이 전해져서 이 기사가 실렸다.
1960 박형룡, 신신학을 이단 용공으로 공격 [신신학=이단 용공이라는 논리는 1960년에 나왔다] 얼마 전 한국교회 쇠퇴의 주요 요인으로 저녁예배 생략이 뜬금없이 지적되었다. 일종의 귀추 논리(abductive reasoning)이다. 1959년 박형룡 목사가 합동측을 분리한 후 1960년 광주에 갔을 때 통합측을 신신학 용공으로 비난하면서, 주일저녁 예배를 생략하는 것이 통합측 신신학의 한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박형룡 목사와 정규오 목사가 통합측의 신신학은 다음 9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인2. 지옥 부정3. 재림 부인4. 북한 목사는 전부 간첩이거나 공산당인데 받아들이면 용공주의5. 구호물품 받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6. 술 담배를 한다.7. 재혼해도 좋다 = 넓은 길을 간다.8. 교회에는 반드시 댄스홀이 있..
1884년 1월 26일 이수정의 편지 발간되다 이수정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 편지 뉴욕 기독교 주간지에 발표되다 일본에서 개종하고 1883년 말 미국교회에 보낸 이수정의 편지는 한국인이 직접 미국 선교사를 한국에 요청한 편지로서, 이 편지가 계기가 되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884년 헤론 의사와 언더우드 목사를 한국의 첫 선교사들로 임명하게 된다. 이수정은 당시 일본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려는 운동을 하자, 조선 양반 기독교인의 체통과 자존심에서 일본을 거친(second-hand) 기독교에 만족할 수 없었고, 미국에서 직수입되는 기독교를 받고자 했다. 그 편지 내용은 모든 교회사 첫 장에 등장하므로 요약하지는 않고 대신 영어 전문을 첨부한다. 그런데 사소한 것이지만 그 편지가 미국에서 언제 처음 출판되었는지 발표 시점을 아직도 정확히 모르는..
목포 일본인 신시가지, 1910년대 [이 사진 한 장] 목포 일본인 신시가지, 1910년대바닷가 언덕에 일본인들을 위해 신사를 설치했다. 직각으로 신작로를 내고 일본인 거주지를 만들었다. 엽서 왼쪽으로 더 나가면 한국인 구 읍이 있고, 그 안에 선교 학교와 병원과 교회가 있었다.모든 식민지 도시는 이렇게 공간이 이분화, 서열화 되었다. 기독교는 민중이 사는 한국인 지역에 위치했다.
1981 소록도 천주교회 이 한 장의 사진1981년 소록도 천주교회출처: Maryknoll (March 1982), 28
1922 공주 목회자 사경회 [이 한 장의 사진]ⓒ옥성득1922년 공주지역 감리회 목회자 사경회 1. 무어 목사가 가르치고 무어의 조사가 한국어로 도와주는 듯. 전도부인 4명도 참석. 남녀 분리대를 치우고 함께 앉았다. 삼일운동 후라 일본 순사가 와서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듣는 한국인 목사들의 태도가 여유롭다. 성경 공부하는 데 쫄 필요가 없다. 순사만 긴장하고 있다. 2. 한국인 목사들의 기도회 사경회 중 기도하는 목회자들. 삼일운동 실패 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던 때 사족) 1. 두 번째 사진에서 오른 쪽 문 쪽에 아이들이 보고 있다. 아이들의 신앙은 이런 기도 모습을 보고 자란다. 2. 내가 어릴 때에 전기가 없는 시골이라 교회에도 저런 등불을 켰다. 나무 마루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1921 게일의 창세기 1장 번역 게일의 창세기 1장 번역, 1921ⓒ옥성득이게 바로 그 유명한 한국어풍(Korean idiom)에 맞는 의역인 '짧게 줄인 풀이역' (abbreviated paraphrase)의 시초. (그 반대로 길게 늘인 풀이역은 공동번역이 시초.) 창세기 1장 첫 페이지에서 히브리어의 반복어구를 한국어법에 맞게 생략하였다. (예, 한국어에서는 주어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술술 읽힌다. 그러나 직역론자들 왈, "게일은 하나님을 없앴다." ... 결국 게일은 이원모 장로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개인역 성경전서인 (창문사: 1925)를 출간하였다. 자유 의역으로 된 최초의 성경전서였다. 게일은 (1) 사라지는 한국어를 안타까워 하며 한국어다운 한국어를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사전도 만들고 번역도 했는데, 최대 작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