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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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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무궁화가 배재학당에서 부르기 시작한 는 그 후렴이 애국가와 동일하다. 1890년대 후반부터 배재학당 등에서 부르기 시작한 창가와 애국가들이 모여 1908년 윤치호의 에서 애국가로 편집되었을 것이다.일부에서 다음과 같이 마구 주장한다.  민족반역자 윤치호가 노랫말을 짓고 일본제국의 부역자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문제를 지적해 온 경희대 법대 강효백 교수는 최근 무궁화가 과연 나라꽃일 수 있느냐를 문제 제기하고 있다. 그는 무궁화가 한국의 나라꽃은커녕 일본제국주의 식민화정책 전략의 일환으로 교묘하게 한국의 나라꽃으로 둔갑시켜 놓았음을 근거를 대고 말한다. 그는 일본에서의 목근(木槿 무궁화) 숭상이 뿌리가 깊고 널리 보편화 됐음을 역사 고증과 실증으로 내보이고 있다. 무궁화 목근 복장(服裝) 기모노 검색만으로도 약 9..
한국전쟁 후 고아 미국에 입양 3,800명 1954-60년 6년 간 미국에 입양된 수와 입양 기관별 통계 1954-56년: 397명 1955-60년: 3,406명---홀트입양프로그램 53.5%, Child Placement Service 29.7%
1952 서귀포장로교회 [이 한 장의 사진] 제주 서귀포장로교회 한기춘 목사 위임식, 1952
1951. 2 "Special Report of Korea," Presbyterian Life 한국전쟁 상황 포항교회 캠벨 선교사의 전도트럭 "예수께서 구원한다" 경북에서만 40개 장로교회 완전 파괴 Rev. Harry Hill, Rev. Edward Adams, James Philips, Raymond Provost Rev. Harold Voelkel, Rev. Francis Kinsler 언더우드 가족, 파괴된 언더우드 동상, 언더우드 홀 피난민의 생활, 피난민을 돕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 영락고아원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 어린이들의 교육 문제 인천상륙 작전 중 Rev. William Shaw의 아들 Bill 사망
1942 일제 싱가포르 공격 기념 대강연 영하(박)인덕, 천성(김)활란, 고령(신)흥우, 무슨 호나 되는 줄 알겠다. 왜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전쟁 지원 강연을 할까? 3년 반 후에 어떤 일이 올지 알 수 없는 인생이다. 대동아의 꿈은 산사조각 났으나, 이들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1950 경찰이 킨슬러 선교사에게 보낸 감사문 1950년 11월 20일 내무부 치안국 보급과 경위 김영덕이 Francis Kinsler 목사에게 감사 편지 전쟁 중 부상 경찰관과 전쟁 피해를 입은 가족에게 구제 물자로 도와준 데 대한 감사장 감사문, 권세열[Francis Kinsler] 목사 귀하 기독세계구제회 한국지부 귀하께서는 금번 전란으로 인한 국가 존망지추에 있어 부상 경찰관 및 동 전재[전쟁 피해] 가족 구제용으로 다량의 구제 물자를 제공하여 주심에 따라 경찰관 사기 진작과 동 가족 구제에 도움이 된 바 불감할뿐 부당라 [불감이요 부당이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다] 본직의 직무 수행상 협조한 바 다대하옵기 심심의[깊은]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치안국장으로부터 보내는 감사장을 전달하오니 희수(기쁘게 받음)하시고 금후 가일층 지도편달과 애..
1883년 4월 29일 이수정 세례 사진 이수정 세례 기념 사진, 1883년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미국의 기독교 주간지도 조사해야 한다] 사진은 이미 공개된 것이지만 1902년 1월 Christian Herald에 나오는 1883년 4월 29일 이수정 세례 기념 사진. 야스카와 목사가 문답을 했고 녹스 목사가 집례했다. 최근에 원본을 구입했다. 사진에서 미국인 선교사 2명, 중국인 어학교사, 한국인 번역자(이수정), 일본인 부부가 있는 것이 상징적이다. 네 나라 기독교인들의 공동 프로젝트로 초기 한국 기독교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원본을 구입한 기념으로 찍었다. ⓒ옥성득 2016. 1. 8
1896년 독립신문 영문판의 기독교 기사 1896년 독립신문 영문판의 교회 기사독립신문 영문판과 한글판은 내용이 많이 다르다. 1896년 영문판은 헐버트가 편집했다. 따라서 헐버트의 신학이나 그의 선교관 등을 엿볼 수 있다. 4월 14일 여주 천주교도 신목 절단 시도여주에서 천주교 신부가 교인들에게 마을에 있는 오래 된 신목(sacred tree)을 베어 버리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고목은 정부 소유의 땅에 있어 정부의 소유였으나, 천주교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주민들은 신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해 서울에 와서 에 호소했다. 헐버트나 서재필의 입장은 신목 신앙과 같은 미신이나 우상숭배를 없애는 것이었으므로 종교적으로는 신목을 베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법적으로는 타인의 재산을 불법으로 침해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