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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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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부활>과 사회 진화론 고희를 넘긴 1899년 톨스토이는 다가오는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지막 대작인《부활》 연재에 들어갔다. 1895년 까프까즈 지방에 ‘두호보르’ 박해 사건이 일어나 천 여 명의 교도가 살해되었다. ‘두호보르’ (Doukhobors = 영혼을 위해 싸우는 자)는 18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정교에 발생한 한 종파로서 원시 기독교의 교의를 엄수하고, 철저한 무저항주의 無抵抗主義와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실행하는 한편, 신의 왕국만을 인정하며 국가, 법률, 병역의무 등 지상의 온갖 권위와 법규를 부정하는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의 신념은 톨스토이의 사상--비폭력, 반국가, 반제도 평화주의--과 일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변하지 않자 정부는 국외 추방을 명했으나, 그들은 캐나다까지의 ..
1919 미주 한인이 읽은 책과 LA 서점 , 1919년 7월 17일자 광고 로샌젤레스 다운타운에서 멀지 않은 138 North Figueroa Street에 있던 태백서관(太白書館)의 광고에 나오는 판매 서적이다. 아마 LA 지역 첫 서점이었을 것이다. 옆으로 길게 나간 광고라 읽기 쉽게 반으로 잘라 실었다. [ ] 안은 이후 몇 개 광고에 나오는 책들이다. 1. 베스트셀러들은 기독교 서적: 성경, 찬송, 창가집, 기독교 청년, [구약사기], [루터개교기략] 2. 과학서적: 신편 동물학, 식물학, [지구의 과거와 장래] 3. 실용서: 실용상법부기학, 자조론, 한국요리 만드는 법, 한영회화 독학, [가정보감], [초학국문] 4. 위인전: 위인원요. 위인 링컨 5. 영문서: H. G. Allen, Korea Facts and Fancy 6. 소설:..
1940-45 임정의 참전과 승인 문제: 김구와 이승만 노선의 대결? 일부에서 김구의 중칭 임정을 깎아내리기 위해 광복군을 비하하는 듯한 글을 쓴다. 참전을 미루었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 임정이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높힌다. 참고, 이영진,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442?fbclid=IwAR0hGzrjeW6nHQnCZFBsOwru_J1JZtpg955EtgXuRgXjQDVSMUxz60uerIA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임시 정부' vs '임시정부' '임시'라는 말은 명확한 기한을 정하지 않은 잠시 동안의 상태를 이르는 명사이다. '정부'라는 단어와 함께 쓸 때는 둘 다 명사이므로 띄어쓰기를 해야 하나, 그..
평양 을밀대의 벚꽃, 1910년대 Peony Point in Cherry Blossom Time - Pyongyang, Korea, 1910s 1910년 경에 심은 나무가 10년 가까이 자라면서 모란봉을 벚꽃으로 덮었다.
1972년 석굴암 불상 도안 1만원 권 지폐 사건
1980 한철하, 파타야 로잔 세계복음화대회 소개 1980년 7월 12일 태국 파타야 대회 참가 후 66년 베를린 이후 세계 복음화운동 정리하면서, 한철하 박사, 여전히 로잔대회 내용 소개치 않아. 광주사태 직후 때문인가 태생적 한계인가? 그러나 1974년에 이미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발행한 신학과 선교에 로잔언약 내용이 실렸다. 조종남, "세계복음화국제대회와 로잔 언약," (서울신학대학교) : 제2집(1974년 9월.) 그런데 한철하는 이 글에서 로잔 언약 간단히 언급하고 세계복음화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1980년 7월 파타냐 세계복음화 대회는 5월의 멜본 CWME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복음주의 권이 인류 사회의 부정의와 위기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이 부분도 침묵했다. .
1972 문동환, 문상희 장신대 강의 "한국 대중과 복음 선교" 1972년 장신대 대학원 세미나 특강 시리즈: 30대 소장들 등장하여 한국교회 사회계급구조 분석 후 하층계급 침투 선교시급하다... 사회적 구원 없이 개인구원 불가하다 주장. 7. 문동환 교수 강의, "교인의 사회 계층에 대한 고찰," , 1972년. 8.문상희 교수 강의, "사회계층적 입장에서 본 한국기독교," 1972년. 벌써 이때 중산층교회 체질 개선, 구조혁신, 양극화로 신흥종교(이단) 범람 이야기.
1975 박형규 목사 1938-45년 북한에서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1960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1960년대에 교회는 죽었을 것이다. 1972-79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1980년대에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0-87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1990년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교회가 교회 내부의 부패와 불법에 대해서마저 침묵한다면 2020년대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 교회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 여기 박형규 목사의 대담 기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