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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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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용어 논쟁 CBS 잘잘법,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https://www.youtube.com/watch?v=7rH7PdujDqk&t=1s
<兒學編>, 1908 정약용 원저, 지석영 증보편찬, 『兒學編』, 1908 정약용 원저 아동용 한자 공부 교재였던 『아학편』를 기초로 지석영이 영어교재로 만들어 1908년에 출간했다. 지석영은 영어, 일본어에 능한 전용규에게 편찬을 맡겼다. 이 교재에서 우리는 당시 영어 발음 공부나 표기를 알 수 있다. 곧 ruler는 으룰러, learn 을러언 식으로 배우고 익혔다. 참고: https://www.yna.co.kr/view/AKR20180214062700005 'rice는 으라이쓰'·'learn은 을러언'…조선시대 영어 발음은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을까. www.yna.co.kr 1908년 발간이라 중국어, 일본어, 영어 표기에 발음도 함께 적었다. 한자,..
용어문제에서 중요한 두 구절 요한복음 10장 34절과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나오는 신명을 히브리어, 그리스어, 한자어, 일본어, 한국어로 정리해 보면, 엘로힘, 야훼를 테오스, 키리오스; 상제, 신, 주; 신, 하느님, 하나님, 주, 천주 등으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한 번 성경 구절을 적어보고 번역해 보라. ​1. 요한 10:34b I have said you are gods. ---이 구절은 시편 82:6절의 인용으로 히브리어로는 엘로힘이다. 따라서 그리스어 신약에는 테오스로 번역되어 있고, 영어 성경들은 모두 gods로 했으나, 한문 성경은 상제, 일본어 성서는 신, 한글 성경들은 모두 신(들)으로 번역했다. ​2. 요한 20:28 My Lord and my God! 1) 히브리어 야훼를 그리스어 70인역..
주시경과 한 하나님 주시경과 게일 어원적 유일신을 하ᄂᆞ님을 새 용어로 만들다 1900년 게일(J. S. Gale)은 하ᄂᆞ님에 대한 새로운 어원적 연구를 소개했다. 서울의 한글 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과 함께 국문(國文)을 연구하던 게일은 토론을 통해 한국인들의 하ᄂᆞ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주시경은 1896년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의 찬술원으로 피선되어 이승만 등과 함께 순 한글 「협성회회보」를 편집하면서 한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서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하기 위해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결성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1897년 9월 25­26일자에서 문법 통일과 사전 편찬을 제안했다. 그는 1898년 6월에 배..
1897년 독립신문의 종교론과 하나님론 1897년 1월 26일자 논설은 여러 종교를 비교하면서 애니미즘을 야만의 종교로, 우상의 종교인 불교, 일부다처제의 종교인 이슬람, 정치학과 윤리학인 유교, 조상과 짐승을 섬기는 어리석은 풍속인 일본 신도는 반개화의 종교라고 비판하고, 그리스도교 안에 구교와 신교와 희랍교가 있지만 신교 국가가 가장 개화되었다고 서술했다. 이 논설은 당시에 유행하던 야만·반개화·개화라는 문명 3분설을 채용하여 한 나라의 종교에 따라 개화 수준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ᄋᆡ푸리가에 잇ᄂᆞᆫ 야만[野蠻]들의 교ᄂᆞᆫ 산과 물과 불을 위ᄒᆞ고 혹 ᄇᆡ암과 큰 즘승들을 두려워 귀신으로 위ᄒᆞ며 아셰야 셔편에ᄂᆞᆫ 모화메든 교가 잇서 그 교에서ᄂᆞᆫ 하ᄂᆞ님을 텬부로 ᄉᆡᆼ각은 ᄒᆞ되 모아메든이란 사ᄅᆞᆷ을 하ᄂᆞ님의 ᄉᆞ신으로 위..
하나님 용어문제에서 한국인의 역할 1895-1904년 용어문제 논쟁 과정에서 문서를 남긴 이들은 대개 선교사이므로, 그들의 견해는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논의가 정리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성서위원회 번역자회 회원으로서 용어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차적으로 그들의 견해와 이해가 중요했다. 그러나 과연 한국인들은 침묵하고 수동적으로 선교사들의 결정을 수용했을까? 다음 책에서 나는 한국인들이 논쟁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원시 유일신에 바탕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참여했음을 논했다. 한국인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갔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조사들이나 주시경과 같은 신흥 한글학자들로부터 하나님 개념을 배웠다. 선교사들의 결정만 기다리고 앉아 있을 한국인들이 아니었..
1937년 그리스도인 통계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37년 말 개신교인-- 224,688명(장로회 162,927명, 감리회 24,793명 , 구세군 14,594명,성공회 8,401명, 안식교회 8,105명, 동양선교회 5,868명 등이었고, 천주교인 149,719명, 정교회 185명. 합계 374,583명으로 개신교인 = 60%, 천주교인 = 40%. 전 인구를 22,000,000명으로 잡으면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구의 1.7%였다. 이게 일제시대 최대치라고 보면 된다. 장로교회와 천주교회의 경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김재준의 송창근 박사 회고, 1954 김재준, "새해에 생각나는 사람들: 송창근 박사," (1954년 3월): 182-185. "내가 죽거든 불에 태워서 그 유골을 네가 가지고 본국에 가서 한국신학대학 현관 밑에 파묻어 드나드는 학생들이 밟고 지나게 하라."-- 송찬근 목사의 유언, 1949년 웨스턴신학교 졸업식 연설 중 뇌일혈로 쓰러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