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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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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 설립일은 1906년 10월 1일 (2008)에 이어 올해 연세대 박물관의 에비슨 전시회에서 1906년 9월 29일을 설립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10월 1일이다. 양성학교(양성소)를 기획, 조직한 것은 9월 29일, 학생을 받아 개교한 것는 10월 1일이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바로잡아야 한다.
홀 의사의 Christmas Seal과 엽서, 1932-40 한국의 어린이와 어머니를 위해 아기 예수 오셨네! 1. 크리스마스 씨일, 1932-1940년 해주구세(결핵)요양원 원장 홀(Sherwood Hall)이 1932부터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1940년까지 해주구세요양원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해 모금하기 위해 고안하고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이다. 영국에서 1904년에 시작된 성탄절 씰 운동은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에서 홀 의사는 한국인의 문화와 고유미, 전통 풍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한국화로 실을 만들어 일제 말 암울한 시기에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의료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2. 크리스마스 엽서, 1933-1937년 80년전 조선결핵박멸운동회. 해주결핵요양원 홀 의사가 만든 크리스마스 실 엽서 4종, 1933..
한국의 첫 공식 간호원 히스코트, 웹스터, 로이스 내한, 1891-92년 개화기 최고의 간호 수준을 자랑한 서울의 영국성공회 병원 1895년부터 내외 풍습을 깨고 남자환자 간호를 시작한 웹스터와 로이스, 6~7년간 봉사 후 죽어 양화진에 묻히다 서울 성마태병원 수술실의 로이스와 웹스터 간호원, 1898년 한국 초기 간호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가지는, 첫 공식 간호원들은 영국 성공회가 파송한 세 간호원이었으며, 1906년까지 서울에서 최고 수준의 간호는 영국 성공회의 서울 낙동(현재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앞) 성마태병원(남자병원)과 정동의 성베드로병원(여자병원)에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1890년에 시작된 영국성공회 한국선교회는 거의 평생 서원한 독신자로 이루어졌는데, 대다수 여자 선교사는 초대 주교 코르프의 요청으로 성베드로수녀회가 파송했다. 성베드로수녀회는 첫..
근대 선교의 모델: 삼각형인가 오각형인가? 흔히 근대 선교는 전도(교회) - 의료(병원) - 교육 (학교)의 삼각형을 모델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자료를 일부만 읽었을 때 내리는 결론이다. 사실은 전도(교회)를 위해서 의료(병원) + 교육(학교) + 문서(활판소) + 여성 사업이 함께 가는 오각형이었다. 한국 개신교는 의료, 교육, 언론과 서적, 여성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신사상과 신기술을 소개하면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 오늘 선교도 여전히 medical mission, educational mission, literary mission, woman mission 등을 통해 소외되고 차별받는 자들을 도울 때 교회가 설 것이다. 문서 선교에는 전도 소책자와 서적은 물론 신문 잡지와 같은 언론 활동을 포함하며, 여성 사업(Woman'..
한센씨병(나병) 선교의 현재적 의미 [leprosy mission 나병선교] 일제 시대 개신교는 부산, 대구, 광주-순천에서 나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하고 간호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약 2만 명의 한센씨병환자들이 존재했다. 일제의 소록도 수용소가 1916년에 정식 개원하기 전부터 개신교 의료 선교는 몸 + 영혼의 전인 구원의 모델로 나병 선교를 전개했다. 1916년은 또 chaulmoogra oil(대풍자유)이 나병 약으로 개발되어 치료에 큰 효과를 보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학계에는 소록도 수용소를 미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관점에서 연구한 책과 논문들이 많다. 현대 사회가 온라인 정보를 통해 '감시와 통제'하는 사회가 되었기에 푸코의 개념은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1910-60년대 한국개신교의 나병 선교는 오늘날 신학의 한 ..
1896 한국 기독교 통계 Daniel L.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 (New York: Revell, 18908), Appendix A. 개신교 선교사 101명, 천주교 선교사 34명 청일전쟁 후 1년 동안 개신교에는 217명이 새로 입교했고, 천주교에는 1,250명이 입교했다. 이 추세는 점점 그 간격이 좁혀지다가, 1902년 전후에 역전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위 표에서 보듯이 의료에 개신교가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병원은 9개, 진료소 12개에서 455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고, 3만 여 명이 외래환자로 치료를 받았다. 교육 선교에서는, 1905년 이후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개신교 학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내 석(박)사 논문의 역사 [30년 전 석사논문] "초기 성경번역에 나타난 주요 논쟁 연구 1877-1939" (장신대 대학원, 1993년 2월) 내가 쓴 1993년 신학석사 졸업논문 안에는 신문 기사 세 개가 들어 있다. 1991년 말 온누리교회 전임전도사를 사임하고, 1992년 1년간 시골 거창에서 쓴 논문으로 1993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가 주는 논문상을 받았고 (3명 수상자 기독교윤리학의 김정준, 실천신학의 장성배, 역사신학 옥성득, 모두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 내 논문이 신문 세 곳에 소개되었다.에는 세 논문 모두, 와 에는 내 논문만 소개되었다. 기독공보와 한겨레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출판된 의 신명과 문체 등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신문 모두 한국교회 보수화를 비판하는 내 논문을 잘 소개해 주었다..
한양에 들어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 1974 혜촌 김학수 화백의 성탄절 그림, 1974 에 실려 흑백인 점이 아쉽지만 ... 잘 알려진 후기의 다른 그림들보다 단순 소박해서 좋다. 제목이 없는데, "한양에 들어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으로 붙여본다. 눈길에 경배하러 가는 모습이다. 아기 예수를 만난 후, 갈 때에는 로 가는 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