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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손글씨 엽서, 1925 (1) 들째아들 필선安必鮮에게 보낸 엽서, 1925. 4. 15 나는 덴버까지 왔고, 오늘은 시카고로 가겠다. 내가 심은 버드나무에 물을 좀 주어라. 네 아부지, 4월 15일. (2) 딸 수라에게 보낸 안창호의 엽서, 1925. 5. 23 내 딸 수라, 너는 잘 있느냐? 나는 평안하다. 내가 너를 보고 싶다. 내달에 집에 가겠다. 5월 23일, 네 아부지. 안창호는 삼일운동으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1919년 상하이로 떠났다. 1924년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북경에 ‘동포에게 고하는 글’ 작성하여 보냈다. 1925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왔는데, 이 엽서들은 미국에서 여러 도시를 돌면서 집에 가기 전에 자녀들을 그리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썼다.
1897 부활론 "부활론," , 1897. 4. 15.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앞서는 부활론의 하나. 성경에 없는, 누에가 변하여 나비가 되듯이. 메타모르포시스로(metamorphosis: 완전 變態 transformation) 비유.
1896 한국 기독교 통계 Daniel L.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 (New York: Revell, 18908), Appendix A. 개신교 선교사 101명, 천주교 선교사 34명 청일전쟁 후 1년 동안 개신교에는 217명이 새로 입교했고, 천주교에는 1,250명이 입교했다. 이 추세는 점점 그 간격이 좁혀지다가, 1902년 전후에 역전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위 표에서 보듯이 의료에 개신교가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병원은 9개, 진료소 12개에서 455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고, 3만 여 명이 외래환자로 치료를 받았다. 교육 선교에서는, 1905년 이후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개신교 학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국 위키 백과 "옥성득" [한국 위키백과 "옥성득"] 안명준 교수님께서 올려주셨다. "한국의 신학자그룹"을 게재 중인데, 내가 1950년대 출생 마지막 주자이다. 학부생으로 한국교회사 공부 시작한 지 38년, 미국에 온 지 30년, 박사학위 받은 지 21년째이다. 그 동안 연구한 결과 책 40권, 논문 60개를 만들었다. 앞으로 책 10권, 논문 15개 더 출판하고 은퇴하면 좋겠다. 일단 올해 책 5권, 논문 2개를 낼 수 있기를. 건강이 관건이다. 수 많은 도움과 기도로 지금까지 왔다. 지금부터 진검 승부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8%A5%EC%84%B1%EB%93%9D 옥성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옥성득(Sung-Deuk Oak, 玉聖..
내 석(박)사 논문의 역사 [30년 전 석사논문] "초기 성경번역에 나타난 주요 논쟁 연구 1877-1939" (장신대 대학원, 1993년 2월) 내가 쓴 1993년 신학석사 졸업논문 안에는 신문 기사 세 개가 들어 있다. 1991년 말 온누리교회 전임전도사를 사임하고, 1992년 1년간 시골 거창에서 쓴 논문으로 1993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가 주는 논문상을 받았고 (3명 수상자 기독교윤리학의 김정준, 실천신학의 장성배, 역사신학 옥성득, 모두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 내 논문이 신문 세 곳에 소개되었다.에는 세 논문 모두, 와 에는 내 논문만 소개되었다. 기독공보와 한겨레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출판된 의 신명과 문체 등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신문 모두 한국교회 보수화를 비판하는 내 논문을 잘 소개해 주었다..
한양에 들어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 1974 혜촌 김학수 화백의 성탄절 그림, 1974 에 실려 흑백인 점이 아쉽지만 ... 잘 알려진 후기의 다른 그림들보다 단순 소박해서 좋다. 제목이 없는데, "한양에 들어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으로 붙여본다. 눈길에 경배하러 가는 모습이다. 아기 예수를 만난 후, 갈 때에는 로 가는 게 인생이다.
성탄절 전도용 발췌 성서, 1954년 성탄절 전도용 발췌성서 표지, 대한성서공회 발행, 1954년 전후에 읽을 거리도 제대로 없을 때 성경은 많은 학생들에게 독서를 위한 거의 유일한 책이었다.
크리스마스 함흥 철수 작전, 1950년 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크리스마스, 14,000명이 구원선 안에서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1. 흥남 철수 사진의 진실 (1950. 12. 22-24) 다음 첫 두 사진을 보면 흥남철수는 평온한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피난민이 승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영화 첫 부분은 너무 많이 틀렸다고 하면 곤란하다. 15일부터 시작된 철수 작전에는 군함과 상선 200여 척이 동원되었고, 에 나오는 철수 장면은 마지막 군 상선/화물선인 빅토리 호 승선을 좀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다큐가 아니다. 그러나 첫 사진만 가지고 혼란과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 22일 흥남항으로 갔다. 당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