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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 개신교 분석 1. 감리교회 교세 100만 명으로 추락 얼마 전 (2018년 5월) 감리교회 교세가 발표되어 약간의 충격을 주었다. 다음은 대한기독교감리회 웹페이지에 공식 발표된 자료이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68 한 때 150만까지 갔으나 이제 100만 명이다. 올해(2018년) 말 예상치는 내가 추가했다. 곧 20년 전인 1998년으로 돌아간 130만 명 수준이다. 그러나 실제 출석하는 교인 숫자는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난 20년 간 감리교회가 보여준 내부 분열과 부패상을 생각하면, 2000년대 10년 간 증가한 것이 이상할 정도이며, 2011년부터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정상적인 통계가 나왔다고 볼 수밖에..
교회 분쟁, 난투극, 폭언, 망발의 시작, 1923년 사찰과 교회가 대형 건물 지으면서,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로 돈/재산 문제로 분쟁 신구 대결(청년층 대 노인층, 자유신학 대 보수신학, 한국인 대 선교사) 1923년 1월 서울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총무원과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사이에 사무실 문제로 난투극 4~10월 평양 장로교회, 서문외교회 건축 문제로 분규, 난투극, 김선두 목사 사임 5월 대구남성정교회 자치파(이만집 목사) 대 노회파(선교사파) 간 예배당 재산권 문제로 활극 11월에는 평양 회중교회 재산권 문제로 분쟁 1924년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지속되면서, 평양 예수교를 비판하는 「開闢』지의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 등장 군산, 재령, 해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서 반기독교 운동과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 전개.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김익두를..
덕혜입문 올해(2022년) 번역본이 김현우, 서신혜, 이고은 공역으로 새로 출간되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내가 2006년 영문 논문으로 소개했고, 그것을 (2020), 575-579쪽에 수정하여 실었다. 초기 한국개신교(와 중국 개신교)에서 가장 널리 읽힌 책(전도문서)의 하나가 그리스피 존(Griffith John 楊格非, 1831-1912)의 (한문 초판 1879년)이다. Gate of Virtue and Knowledge라는 책명에서 보듯이 기독교 교리와 자연과학을 통해 예수교에 입문하도록 했다. 존의 글을 문서 조사인 션즈싱(沈子星, 1825-1887)이 유려하고 쉬운 문리체(淺문리)로 바꾸어서 출판했기 때문에 문장의 풍(風), 혹은 풍미를 중시한 중국 지식인..
[신조어] 하나님, 1905~07년 1905-07년 일반인들이 사용한 '하나님’ 1. 1905년 11월 19일자 : 을사조약 후 국가가 침륜 멸망하는 지경일 때 10만 예수교인은 매일 위국기도회를 열고 위국기도문으로 하나님께 나라를 구해 달라고 기도했다. 2. 1906년 4월 20일자 의 사설, "예수교회에 대하여 충고함" 예수교인 청년들이 힘을 믿고 악행하고 돈을 착취하는 교폐에 대한 비판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을 존봉하고 십계를 지키어 충애를 주장하는" 예수교회가 그런 누명에서 벗어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때부터 예수를 팔아 조직(회)를 만들고 돈을 뽑아내는 ㅈ광훈 같은 자들이 있었다. 작폐하는 불한당들이었다. 기사의 청년회 집단은 안되자 일진회에 가입했다. 교'회'에서 일진'회'로 갔다. 3. 1907년 皇城新聞 연재소설 의 ..
제1회 종교간 대화, 1965년 "韓國 諸宗敎의共同課題: 6大 宗敎 代表가 모인 討論에서" , 1965년 10월 21일. 韓國化·現代化되어야|親睦·聯合硏究·社會參與다짐 韓國「크리스찬·아카데미」가 주최한 「韓國諸宗敎의 共同課題」에 대한 국내 6대 종교 대표의 「대화」가 18·19일 이틀에 걸쳐 龍堂山「호텔」에서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종교각계의 대표 2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共同의廣場」을 마련한 이 토론회는 李能嘉스님(佛敎)·黃溫順여사(圓佛敎)·柳承國교수(儒敎)·朴養雲신부(가톨릭敎)·白世明씨(天道敎)·金在俊목사(프로테스탄트) 등의 자기 종교를 대변한 發題강연에 이어 社會參與、信仰의 自由 등 7개 항에 걸친 대화를 나누었다。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시종 겸양의 덕을 보인 이들은 타종교와의 친목과 연합적인 연구와 사회참여를 위한 기회를..
박인덕의 징병제 지지, 1942년 5월 일제는 1938년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고, 1944년징병제를 실시했다. 1942년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발표하자 5월에는 기독교인들도 지지 대회를 개최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성 인사 중 '조선의 노라' 박인덕(창씨개명 永河仁德, 1896 ~1980)은 5월 19일 서울 중앙예배당에서 열린 감리교단 경성교구 주최 징병제 지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2년 후에 실시될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덕화여숙 교장이었다. , 1942년 6월 3일. 박인덕은 3.1운동으로 감옥 생활을 하는 항일 노선에서 1930년대말부터 친일 노선으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 활동을 했다. 아래는 그녀의 생일을 제목으로 한 1952년 책 표지. 성을 PAHK으로 했다. 덧) 이 책은 박인덕이 얼마나 영어를 잘 했는..
배털즈비, "저녁 기도" Evening Prayer by C. Maud Battersby 한글 번역 『監理會報』, 1936년 11월 10일. 1 If I have wounded any soul today, If I have caused one foot to go astray, If I have walked in my own willful way, Dear Lord, forgive! 2 If I have uttered idle words or vain, If I have turned aside from want or pain, Lest I offend some other through the strain, Dear Lord, forgive! 3 If I have been perverse, or hard, or cold, If I ..
박인덕 고황경의 징병제 지지 글, 1943년 다음은 朝鮮金融組合聯合會가 발행한 제70호(1943년 10월 1일)에 실린 박인덕과 고황경의 글이다. 자녀 교육에 대한 권면에서 자녀들을 잘 길러서 국가가 원할 때 희생이 되더라도 징병제에 따라 황군으로 바칠 것을 주장했다. 개인이나 집안의 보물을 넘어 국가에 필요한 군인을 기르는 게 어머니의 최고 의무라고 강변했다. 국가주의, 제국주의 자녀관이요 어머니관이었다. 마지막 광고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