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80) 썸네일형 리스트형 희생 양 = 희생 염소, 레위기 16:10 한국교회는 1911년 구약전서가 처음 출판되기 전까지, 신약만 읽거나, 구약을 보려면 이 문리 한문본을 읽었다. 우리가 아는 초대 한국교회가 읽은 성경이다. (1910년까지 구약 한글 성경이 없어도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대부흥도 경험했다. 물론 구약에 대한 가르침은 있었다.) 한문 성경 대표자역본(= 文理本 구약, 1853)에서 goat를 羊으로 번역한 이후, 한중일 기독교 문서는 속죄양, 희생양의 단어를 사용해 왔다. 당시엔 양이 염소였기 때문이다. 레위기도 利未記로 음차 번역했다. 레위기 안에 양(염소)이 중앙에 들어가 있어 핵심어이다.^^ 그런데 원래 중국이나 한국에는 오늘 우리가 아는 양(sheep)이 없었고, 산양을 가축화한 염소(=羊)만 있었다. 그래서 12간지의 미未는 사실 양(sheep)이.. 1938년 6월 초의 신사참배 진행 상황 한 선교사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정기 선교 편지이다. 누가 보낸 글인지 찾으면 올리겠다. 초록색 박스 안에 현재 조선장로교회 안에서 진행된 각 노회별 결정과 궁성요배(천황숭배), 신민 서사 제창,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관련 실천 양상이다. 일단 동방요배는 살아 있는 천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거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동의하고 실천했다. 신민서사 암송이나 일장기 경례도 수용했다. 그러나 기실 엄격한 잣대로 보면 황제 숭배는 로마 시대나 1930년대 말이나 현현신에 대한 숭배(예배)였기에 신사에 가서 절하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기미가요를 부르고 군주의 치세는 천대부터 팔천대까지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황국신민 맹세를 했다.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 임정은 삼일절이나 임정수립일을 건국일로 기념했는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질문 1. 1920년 3월 1일부터 임정은 삼일절을 어떤 경축일(국경일)로 기념했나? 질문 2. 1919년부터 개천절은 어떤 경축일로 기념했나? 2번부터 보자. 1919년 11월 27일자 상해 독립신문이다. 11월 21일(음력 10월 3일) 삼일당에 모여 건국기원절을 경축했다. 대종교인들이 주최했지만 동포들이 함께 참석했다. 민단 총무 양제헌 사회로 애국가를 합창하고, 박은식, 조완구, 안창호의 연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도 다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므로 이 날을 경축해야 한다고 믿었다. 안창호는 다 같은 단군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合하면 立하고 分하면 倒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래 1920년 달력에서 2번 독립 기념일에서도 개천절을 양력..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잊혀진 설립일과 첫 정청[청사]의 위치옥성득 2016. 2. 15. 14:54 현재 상하이에 새로 꾸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된 작은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프랑스 조계 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할 당시 사용한 첫 정청(청사)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첫 청사에 대해서 독립기념관에서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본래 위치나 주소를 잘 모르는 듯하다. 자료 1. 현재 독립기념관 웹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16) 임시정부 청사 보창로 309호◎ 옛주소 : 상해시上海市 불조계佛租界 보창로寶昌路 .. 1919-1921 상해한인교회 A. 1919년 상하이에 한인교회가 있었을까? 다음 1919년 12월 27일 성탄 행사 기사에 의하면, 조계지 북경로에 있었다. 피치(Gorge Field Fitch)목사가 주선해 준 베이징루(北京路) 18호에 위치한 ‘북경로 예배당’이었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이것이 1921년 프랑스 조계지 안 '삼일당'으로 옮겨 가게 된다. https://search.i815.or.kr/subService.do 1920년 상하이 지도에서 북경로를 확인해 보자. 남경로(Nanking Road)가 번화가였고, 그 위에 북경로(Peking Road)가 있었다. 한인 교회는 이 거리 어딘가에 있었다. (추가 조사 요) 1920년 상하이의 모습이다. B. 1920년 말 교인 수와 지도자는?1920년 말 남녀교인 183인 -.. 1984년 11월,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 두 사람을 만나다 "아펜젤러 목사와 이만열 교수를 만나다"1885년 [고종 22년] 4월 5일오후 3시 네 명의 선교사와 한 명의 선교사 부인이 기선에서 내려 작은 거룻배를 타고 제물포 항에 상륙했다. 썰물이 심해 큰 배는 부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부인의 이름은 Ella Dodge Appenzeller, 한국에 파송된 첫 목회 선교사는 Rev. Henry Gehart Appenzeller(미국 북감리회)와 Rev. Horace Grant Underwood(미국 북장로회), 그리고 한국 상황을 시찰하러 온 미국 공리회(회중교회,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 for Foreign Missions) 소속의 재일본 선교사 테일러(Rev. Wallace E. Talyor, MD, 오사카 거주) 의사와.. 신학생이여 분발하라 공부하기 힘든 때입니다.그럴수록 서른 살에 주교가 되어 45년 간 봉사하면서 아리우스파 황제들과 불화하여 5번이나 유배를 당해 17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진리에 대한 열정과 강골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는 부제이던 27세에 알렉산더 주교의 수석 비서로 지내면서 75세의 아리우스 장로의 주류 신학을 비판할 수 있는 학문성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류 목회나 주류 신학에 겁먹지 말고 교회 개혁을 위해 깊이 있는 성서 연구와 신학을 하기 바랍니다.신앙을 유지하기 힘든 때입니다.그럴수록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단독자가 된 루터를 생각합시다. 총회나, 노회나, 대형 교회나, 아버지의 권위보다 성서의 권위를 우위에 .. 가톨릭의 십계명은 제2계명 우상숭배 금지를 없앤 것인가? 가톨릭의 십계명은 제2계명 우상숭배 금지를 없앤 것인가?가톨릭과 루터교회가 사용하는 십계명과 한국의 일반 개신교회와 정교회, 성공회 등이 사용하는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다르다. 즉 가톨릭의 십계명에는 일반 개신교의 제2계명이 보이지 않고, 대신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9-10계명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보고 신사참배, 제사, 우상숭배 문제에 민감한 한국의 장로교인들은 천주교가 제2계명을 없앤 것이 마리아 상이나 성인 상을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뭘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다음 두 기사를 읽어보시라.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219199&path=200708출애급기가 20장을 읽어 보면,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이전 1 ··· 65 66 67 68 69 70 71 ··· 9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