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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일 (월) 발표된 기도 요청과 읽을 성경 구절 1919년 3월 3일 (월) 발표된 기도 요청1. 주일에는 금식하며 기도하세요.2. 어디에 있든지 아침 6시, 정오, 저녁 7시에 기도하세요.3. 깨끗한 마음으로 매일 다음 성경을 읽으세요.3월 4일 (화): 야고보서 1장; 5장 13-20.3월 5일 (수): 이사야서 59장 1-21.3월 6일 (목): 로마서 8장 시작하는 날: 에스더 3장 -10장, 황금 구절은 4장 13-17절.3월 1일: 사도행정 12: 1-253월 2일: 예레미야 12장3월 3일: 신명기 28:1-14; 마태 5:43-48, 마태 6: 30-34.
1905년 8월 9일 이승만이 민영환 대신에게 보낸 편지 1905년 8월 9일 이승만이 민영환에게 보낸 편지유영익, 송병기, 이명래, 오영섭 편,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29-35.이승만(1875-1965)은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5년 9개월 감옥 생활을 하고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잠시 상동청년회 교장을 한 후 민영환의 주선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여기서 고종의 밀사설이 나왔다.] 11월 29일 하와이에 도착했고, 독립 외교 활동을 구상하던 윤병구 목사를 만나 함께 워싱턴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청원하자고 합의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문 이승만은 연말에 워싱턴으로 갔다. 한국 공사관에서 김윤정 서리공사를 만나 ..
1918-19년 이승만의 국적 문제 단일 국적주의와 단일민족 순혈주의 한국사관 ⓒ옥성득 2016.8.24 1. 최근 국회의 모 모임에서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가 외국인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깎아 내렸다. 2. 몇 년 전 이승만이 1918년 미국 1차대전 군 징집을 위한 등록 카드에 자필로 '현재 국적'을 묻는 란에 ‘Japan'이라고 썼다고 질타한 글이 나왔고, 지금도 이승만을 공격할 때 애용한다. 3. 위의 두 사례는 대다수 한국인이 가진 단일민족 단일국적주의의 신화 때문에 생긴 잘못된 인식과 시각들이다. 4. 1910년 대한제국(Korea)이 사라지면서, 한국인의 법적인 국적은 일본(Japan)이 되었다. 해외에 나간 이들은 혹 미국, 혹 중국 등의 국적을 얻어 활동했다. 영어 신상 카드에 보면 인종(ethnic..
1905년 8월 이승만 미국외교활동, 2011년 한겨레신문 왜곡 후 가짜뉴스 확대 1905년 여름 이승만은 고종 밀사도 아니고 일진회 대표도 아니었다.8,000명 하와이 한인 대표로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은 태프트 국방장관의 추천서를 가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힘써 줄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개인 자격으로 전달했다. 당시 워싱턴 디시에 한국 공사관(김윤정 서리공사)이 있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두 사람의 문서를 개인 문서로 간주하고 공사관을 거쳐 공식적으로 올리라고 말했다.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이미 태프트 장관이 일본 외무상 가츠라와 밀약을 맺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1년 한겨레에서 이승만 외교를 친일로 몰았고, 2012년 정병준 교수가 논문에서 그 왜곡을 일정 수용하자, 이후 이승만의 독립 외교가 어느새 일진회 친일 활동으로 둔..
1907 Clark's letter to Friends [발굴] 1907년 3월 1일 클라크(Charles Allen Clark)가 미국 친구들에게 보낸 정기 선교 서신1907년 2월 18일부터 며칠 간 서울 승동교회 길선주 사경회에서 성령 강림하여 회개 이어짐.모든 기독교인들 회개하고 정화되고 새롭게 됨, 정신 여학교 학생들도 성령 체험하고 회개.길선주 장로의 귀신 추방을 보고, 신학교 때나 1906년에 읽은 네비어스의 보고도 믿지 않았던 귀신 들림과 귀신 추방이 사실인 것을 믿게 되었다. 부흥의 결과, 교인들 전도 날연보와 헌금하게 되었다. 1인 평균 17일 날연보를 드렸다. 밀러나 에비슨 등 선교사의 하인들이 돈 훔친 것 회개했다. 서울에 성령께서 강림해서 여러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비록 몇 사람이 죄를 끌어 안고 끙끙대며 고백하지 못했으나, 비참함을 ..
숭실학당은1898년 초에 개교 1917년에 발간된 숭실대학 그레함 리 추모 팸플릿, p. 6 1898년 초에 숭실학당이 개교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 베어드는 18명의 학생으로 사범학교를 시작했다. 이들을 훈련시켜 초등학교 교사로 파송할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수가 450명이 된 1900년 숭실중학교인 Academy를 시작했다. 숭실대학은 1906년 봄에 개교했다.
1919 서울 탑골공원 위치 1919년 서울은 군사 경찰 도시구 도시 중앙 청색 원 안에 초록색 탑골공원이 있다. 1920년 서울 (경성) 지도 용산의 분홍색 부분이 군용지로 일본 육군 사령부가 차지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가 탑골 공원 주변과 시내에 배치되어 시위를 진압했다. 서울은 군사 경찰 도시였다.
1919년 설립된 시카고한인감리교회에 1923년 김창준 목사 부임 시카고 한인 감리교회, 19191919년 8월에 설립된 시카고 지역 최초의 한인교회이다. 위와 같이 Korea Review(『한국평론』) 1919년 12월 호에 실린 사진에는 약 40명이 모여 있다. 1919년 당시 시카고 지역 한인들의 수가 대략 40∼50 명 정도로 거의 모든 한인들이 이 교회 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대 목사로 최 N. Y.(조사 요)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1923년 9월 시카고한인감리교회의 이름으로 다시 설립되었다.설립에 앞장 선 인물들은 강영소, 김경, 김원용, 박장순, 염광섭, 차의석 등이다. 1923년 이들은 3·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김창준(金昌俊) 목사를 초빙해 예배를 드렸다. 1927년 5월 8일 레이팍 애비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