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80) 썸네일형 리스트형 1919 3 10 예수교 여학생들이 만국평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한민족 독립선언, 세계에 전해 달라” 3·1운동 직후 기독 여학생, 윌슨 대통령에 호소의 편지, 1919년 3월 10일국민일보 2019년 3월 1일 자에 다음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내용에 이 편지가 윌슨 대통령과 세계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으나, 1) 뉴욕에서 발간되던 기독교 주간지 The Christian Herald 6월 28일 자에 보도되었다. 2) 미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 박사기 8월 22일에 늦게 수령한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서울의 이화학당 학생들이 썼을 가능성이 높고, 감리회 여선교사가 타이핑을 해서 북감리회 본부에 보냈고, 신문 보도 후에, 그 사본이 브라운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따라서 만국평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고 .. 1918 11 25 국민회(이승만)가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독립 청원 편지 1918 11 25 국민회(이승만, 정한경, 민찬호)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파리평화회의 원칙인 민족 자결주의를 한국에도 적용하여 독립과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자고 청원하는 편지일본의 비인도적인 전제 정치를 끝내고 한국인이 원하는 자신의 정부와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피력그러나 이 편지는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 오기 전에 안창호 등이 작성한 것으로, 1905년 2월 26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워싱턴 디시에서 서명했다. 아마도 그날 이승만이 국무차관 폴크를 만났을 때 전달했을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대한민국 국호 사용, 1919년 4-6월 국호 대한민국 The Republic of Korea는 1919년 4월 11일 조직된 상하이 임정과 4월 23일 조직된 한성 임정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던 이승만은 한성 임정이 자신을 집정관(president)으로 선출하자, 먼저 총독부에 죄수들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어서 6월 14일에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영미불독에게 알렸고, 6월 18일에는 일본 국왕에게도 편지로 선포했다. 상하이 임정의 첫 내무총장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명칭 사용을 금했으나, 이승만은 외교 상 필요하다고 답했다. 결국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 그러나 내분으로 이승만은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오게 된다. 한성 대한민국 (The Repu.. 스코필드 의사와 매큔 박사, 1919 삼일 독립 운동의 숨은 주역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 의사(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5일 ~ 1970년 4월 12일)와 선천 신성학교 교장 매큔 (George Shannon McCune 尹山溫,1873. 12. 15-1941. 12. 7) 박사 Dr. Scofield of Severance Hospital and Dr. Goerge S. McCune of Seoncheon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의사는 일제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전 세계에 알렸다. 매큔 교장은 1919년 3.1운동 때 시위 참가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 일로 인해 그는 1921년 추방 당했다. 1929년 5월 제4대 학장으로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길선주 목사와 삼일운동 옥성득, "길선주 목사와 삼일 운동,' , 2019. 2. 27 https://cemk.org/11868/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부정적 언급일부 민족주의자들 중에 33인 중 한 명인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1869. 3. 25-1935. 11. 26) 목사가 3월 1일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으나, 중간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어서 친일 목사가 되었다고 비판해 왔다. 다른 자료에서는 길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를 핑계로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해 왔다. 전자는 악의적 왜곡이고 후자는 사실에 대한 부분적 이해이다. 민족대표 33인 회의 장면.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독립지사로 나중에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를.. 1973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 1973 부흥회/전도대회와 정치성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하는 한경직 목사 (대회장)와 빌리 그레이엄 부부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군용지인 5.16광장에서 한경직 목사를 대회장으로, 그레함 목사를 주 강사로, 김장환 목사를 통역 설교자로 하여 매일 50여 만 명, 연인원 320만 명이 모인 가운데 17개 교단이 연합한 초교파 대형 전도대회가 열렸다. 본 대회가 열리기 전 5월 17일부터 6개 도시에서 전도 대회가 열렸고, 연합 성가대 9,500명을 비롯하여 연인원 120만 명이 참석하여, 16,703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도 집회였다. 신도 350만 명으로 20세기의 기적을 이룬 한국 교회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 민족 복음화 대성회, 1977년 민족 복음화 대성회, 1977년70년대 대형전도 집회의 정치성과 상업성 3 민족복음화성회준비위원회는 3년간 준비한 후 평양대부흥회 70주년인 1977년 광복절에 서울 여의도에서 77민족복음화대성회(고문 백낙준, 한경직, 대회장 김세진, 위원장 신현균)를 한국인만의 힘으로 개최했다. 대회 표어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가 보여주듯이, 민주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복음전도를 목표로 하였으며, 외국인 강사가 주도한 앞의 두 대회와 달리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인” 부흥회로 신현균 목사가 주강사로 집회를 인도했다. 이에 앞서 전국 300여 곳에 ‘77성회 지구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600여 명의 한국인 강사가 부흥회를 열고 복음화와 비상시국을 위해서 기도했다. 1976년 8월 판문점.. 1919 Open Letter by the (Christian) Women of Korea 朝鮮婦女泣告世界婦女 Open Letter by the Women of Korea , 1919 朝鮮婦女泣告世界婦女한국의 기독교인 부인들이 세계 (기독교계) 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영문판에 우리는 한국 기독교인 부녀들이라고 밝히고 있다.)4월 17일의 제암리사건을 언급하고 그 사진을 게재한 것으로 보아 1919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원고가 완성되어 5-6월 중으로 상하이에서 인쇄된 듯하다. 사진은 거의 세브란스병원 캐나다 장로회 선교회 의사 스코필드가 찍은 것이다. 삼일운동으로 조선 여성들이 겪는 수난을 글과 사진을 고발하는 편지로 현재 프린스턴신학교에 소장.1919년 4월 말까지 2,000여 명의 소녀들이 감옥에 있으며, 고문을 당했으며, 여러 명이 단순히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총과 칼에 맞아 죽고 중상을 입었다고 고.. 이전 1 ··· 73 74 75 76 77 78 79 ··· 9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