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80)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용민,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이용민,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2019년 1월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 평양의 개념 평양이 기독교와 관련된 최초의 일은 1866년 9월 토마스가 상선을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오고자 하면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후 1880년대 『예수성교전서』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글 번역의 쪽복음이 평양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90년대 초반 이곳에 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하기 위해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면서부터였다. 해방 이전 평양의 기독교 교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평양의 공간적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시 평양에는 1413년에 정비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 수운교 도솔천 [수운교 도솔천] 3년 전 대전에 있는 수운교 도솔천에 들어가 천단을 보았다. 외부인에게 보여 주지 않는데 특별히 들어갈 수 있었다.유불선 동학이 혼합되었으나 불교화된 천도교였다. 사진은 그 도솔천 천단에 들어가는 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늘 잠겨있다. 한 때 수십 만 신도가 구름처럼 모였으나 이젠 노인 몇 남은 동학계 민족 종교. 한 절에서 온 젊은 스님이 주일 법회를 인도한다고. 낡은 본부 사무실을 지키는 회장이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교주가 말한 예언들이 이루어진 예들을 설명했다. 좋은 부동산을 가진 서구의 한 교회를 본 느낌. 미래의 한국 교회를 훔쳐본 것일까? 너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참으로 믿었느냐? 세례로 본 한국 개신교회사----- 최근 한 여검사의 고발로 모 전직 검사의 어중간한 세례 간증과 교회의 변명이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130년 간의 한국교회사를 세례라는 관점으로 거칠게 간단히 살펴보자. 1. 목숨을 걸고 경건하게 세례를 받다, 1879~1890년1879년(고종 16년) 초에 두 명의 의주 청년이 만주 우장의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갔다. 그들은 친구 백홍준의 부친이 로스 목사로부터 받은 한문 신약전서와 소책자를 2년 이상 몰래 읽어 왔으며 예수교를 더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매킨타이어는 이들을 중국인 교회 초신자 반에 편입시키고, 한문에 능한 한 명에게는 한글 복음서 번역을 맡겼다. 당시 로스 목사는 안식년 휴가로 영국에 가 있었다. 두 청년이 세례를 요청하자 .. 1925-35 조선 철도 노선도 다음 지도는 1920년대 중반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도이다. 역 이름을 쓰기 위해 지도를 변형해서 재미 있게 보인다. 부산-서울-의주 노선과 대전에서 갈라지는 호남선, 서울-원산의 경원선, 원산 -함흥--나진-회령의 함경선 등이 완공되었다. 장로교회는 이 철도 노선을 따라 선교지부가 형성되면서 급성장할 수 있었다. 1911년 11월 압록강 철교의 완성으로 경의선이 선양까지 가는 안동선과 연결되어 만주-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연장되었다. 인천에서 파리로 가는 시베리아대륙횡단철도를 탈 경우, 서울-의주-선양 노선을 택하지 않고, 대개 인천에서 대련까지 기선을 타고 가서, 대련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대륙횡단철도를 탔다. 그게 시간적으로나 편리성에서 더 나았다. 다음은 1930년대 중반의 철도 관.. 1931 신정 찬송가의 가사 개정 노력 1931 신정 찬송가의 가사 개정 노력 좌절 아래는 진보적인 장로회 선교사 William C. Kerr의 "The Revision of the Union Hymnbook," Korea Mission Field (Nov. 1925): 241-243에서 243쪽이다. 1923년 조선개신교선교회공의회는 찬송가위원회를 조직하고 새 찬송가를 만들기로 했다. 기존 재고가 거의 없어졌고, 동경 대지진으로 인쇄 원판이 사라졌고, 청년층이 부르기에 편한 가사로 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잘 부르지 않는 곡은 없애고 새 곡을 넣을 필요가 있었다. 2년 간의 예비 작업을 거친 후 최종 찬송가 개정위원회 위원으로 선발된 자는Miss M. E. Young, 변성옥, 김인식, William C. Kerr 4인이었.. 언더우드는 어떤 사람이었나: 넓은 날개와 불 동가리 첫 목회 선교사 언더우드: ‘넓은 날개’와 ‘불 동가리’의 삶 내한한 첫 개신교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 ~ 1916. 10. 1.) 목사는 1859년에 태어나,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어,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32년간 봉사한 후 57세에 소천했다. 개척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40대에 백발이 되었으나, 늘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청년으로 살았다. 한국인은 행동주의자요 열정가인 언더우드를 두 가지 별명으로 불렀다. ‘넓은 날개’(wide wings)와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 ‘넓은 날개’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 그는 한 사람이 감당했다고 보기에는 엄청난 양의 다양하고 폭.. 소래교회는 언제 설립되었나? 소래교회는 언제 설립되었나? 1884, 1885, 1886, 1887년 중 언제?1925년 12월호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번하이젤 목사가 쓴 소래교회 40주년 기념식 글이다. 발표된 시점과 행사를 보면 1885년에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첫 페이지 세 번째 문단을 보면 한국에서는 나이를 셀 때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이듯이, 교회도 설립될 때 한 살로 치기 때문에 실제로는 1886년에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886년이라면 로스 목사가 지푸에서 보낸 한문 신약전서와 전도문서, 한글 복음서들을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묄렌도르프 부부의 도움을 통해 받아서 공부하며 예배를 드리던 때였다. 곧 1886년 서경조가 로마서를 읽고 '심중전'을 하며 바울을 따라 .. 1919 삼일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과 미국 언론 보도 삼일운동, 제암리 참변에 대한 미국 언론 보도독립 반대한 <뉴욕타임스>와 한국 상황 널리 알린 테일러 AP 기자와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 의사 삼일운동에 대한 <뉴욕타임스> 보도를 먼저 검토하고, 이어 대표적인 학살 사건인 '제암리 사건'에 대한 여러 미국 신문 보도를 비교해 보려고 한다. 2014년 2월 27일 에 소개된 로버트 워드의 기사도 검토하여 제암리 사건을 재정리하려고 한다. 1919년 3월 당시, 삼일운동에 대한 <뉴욕타임스> 입장3·1 독립운동은 미국 언론에서 4월 말부터 보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전에 는 3월 20일 자 사설 'Egypt and Korea'을 게재하고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다. 아마도 서울에서 3월 6일부터 와 가 시위 사태를 보도하고, 일본어 신문들도 보도하기.. 이전 1 ··· 76 77 78 79 80 81 82 ··· 9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