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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일 일요일 안식교회 교인들 만세 시위 1919년 3월 2일은 일요일그래서 3월 1일 토요일이 거사일로 결정되었고, 1일 시위가 일어난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는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가운데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주일 예배도 드릴 수 없었고, 만세 시위도 거의 없었다. 다만 3월 2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의 안식교회당(安息敎會堂)에서 기독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3월 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진 다음 날인 3월 2일 평양과 인접한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서 기독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리에는 기독교의 한 갈래인 안식교의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교회 전도사인 박종은(朴鍾恩)은 3월 1일 평양 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군중을 모아놓고 조선 독립에 관해 연설하기도 하였다. 3월 2일..
(옥성득) 길선주 목사 1919년 3월 1일 행적은 애국심의 상징 https://cemk.org/goodtree/ 기윤실 , 2019년 2월 27일 길선주 목사와 삼일 운동: 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일부 비판에 대해 답함 옥성득 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부정적 언급 일부 민족주의자들 중에 33인 중 한 명인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1869년 3월 25일~1935년 11월 26일) 목사가 3월 1일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으나, 중간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어서 친일 목사가 되었다고 비판해 왔다. 다른 자료에서는 길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를 핑계로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해 왔다. 전자는 악의적 왜곡이고 후자는 사실에 대한 부분적 이해이다. 독립지사로 나중에..
1919 서간도 북간도 한인 인구 간도 인구서간도에 20만, 북간도에 30만 계 50만
1919년 5월 "만국 예수 교우에게" 기독교인 11인의 탄원서 1919년 5월 "만국 예수 교우에게" 대한국 예수교인 11인의 탄원서일본 군국주의의 쌓인 압제와 불법에 항거하고 -----세계 공론에 의지하여 자유와 독립을 위해 삼일 만세 운동을 했으나, 일제 경찰과 군인은 살생과 구타에 여지 없다.-----경향 각지 감옥에 설 틈이 없을 정도로 인민을 착수하되 어린 아이와 부녀자까지 능역과 악형을 가하고 있다. -----교회당과 학교를 불살랐다.----우리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고 도덕적 원조를 해 주시기를 바란다. 목사 안승원, 손정도, 장덕로, 김동조, 조상섭, 배형식, 장로 조보근, 김시혁, 김승국, 장붕
1929 불교 사찰에서 서울 남감리회 수양회 다음은 1929년 10월 말 양주삼 목사가 빅터 피터즈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1929년 11월 교역자 수양회를 도선암 불교 암자에 가서 연다는 사실이다. ​1910년 6월 22-27일 서울 YMCA가 불교 사찰인 진관사에서 제1회 하령회(여름 수양회)를 한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의 첫 템플스테이였다. 그런데 1929년 11월에 서울 남감리회 교역자 수양회를 도선암에서 가졌다는 것은 아래 양주삼 장로사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1919년 3.1운동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는 함께 민족 독립을 외쳤다. 엄연히 다른 세 종교가 민족의 문제와 인도적 차원에서의 운동에서는 얼마든지 함께 만나 일할 수 있다는 역사적 전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이후 한국 교회는 민..
세속 성자의 의미 개인戰에서 전면戰으로“하나님이 종교개혁 시대에 자신의 종 마르틴 루터를 통해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의 복음을 다시금 일깨우셨을 때, 루터로 하여금 수도원을 거쳐 가게 하셨다.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순종하면서 따르기를 원하였다. 수도원으로의 부름은 루터에게 그의 전 생명을 걸게 하였다.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서 실패하였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이 특별한 개인의 공로적인 행위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뒤따름의 겸손한 활동이 수도원에서는 특별한 자들의 공로 행위로 변질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뒤따름이라는 자기 부정이 경건한 자들의 영적인 자기 드러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마포삼열의 강의법 방지일의 평양신학교 교수 마포삼열 강의 기억 방지일은 평양 장로회신학교(1937년 졸업)에서 은퇴한 후에도 평양에 남아서 가르치던 마포삼열(S. A. Moffett) 박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다음은 인상 깊게 남은 강의의 한 구절이다. 마 박사는 늘 "데는" 투를 늘 사용했다. "나는 믿기는 믿는데는 설명은 못 할 것인데는 여러분도 믿을 것일데는 믿지 못하면 물을 것인데는 나는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나는 그래도 믿을 것인데는 못 믿을진데 물을 것인데는 나는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반복) (학생들이 웃으면) 된 것인데는..." (출처: Moffett Korea Collection, PTS) 40년 이상 한국인을 가르치고 1901년 신학교를 설립한 후 35년 이상을 가르친 노 교수의 결론은 "나는 설명할 수..
1920년대 간도 시베리아 선교지 분할도 1910-20년대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지 분할 (comity)장로회는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과 북간도 위쪽 담당. ( )안은 1919년 당시 한국인 인구 / 교인 수 1) 서간도(350,000명 /4,600명)는 북장로회, 2) 남만주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봉천노회 3) 북간도(400,000명 / 10,000명)는 캐나다장로회 4) 북간도 위쪽 시베리아 근처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북만노회감리회는 땅은 넓지만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919년 현재 감리회 선교지 전체 한인 인구는 400,000명 1) 북간도 일부와 간도 위쪽 만주 전체는 북감리회 2) 시베리아는 남감리회이러한 분할은 당시 교세가 장로회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도가 장로회 선교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압록강과 두만강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