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80) 썸네일형 리스트형 1965 대천덕 신부 예수원 설립 [2월에 생각나는 사람]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 Reuben Archer Torrey, III1918년 1월 19일, 중국 산동성 제남 출생 1928∼1932 북중국 미국인학교(North China American School) 1933∼1934 한국 평양 외국인학교 (Pyongyang Foreign School) 1934∼1935 중국 연경대학(Yenching University) 1935∼1939 데이비슨 대학(Davidson College; 남장로회) 학사 1939∼1941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y Seminary) 1940∼1942 유에스 엔지니어(U.S. Engineers) 근무 1941∼1942 철강회사(Structural Iron Work) 근무 1942∼1947 단속.. 1940년 2월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1940년 2월 5일 산정현교회 교인 1천명, 주변 교회 교인들과 시민 약 1천명, 합 2000명 앞에서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 주기철 목사, 1937년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4번)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9번)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 1879년 1월 한국 개신교인 첫 세례-올해는 140주년 https://cemk.org/11185/1879년 1월 한국 개신교인 첫 세례--올해는 140주년 올해는 1879년 평안도 의주(義州) 청년 4명이 한국 개신교 첫 신자가 된 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들은 로스(John Ross, 1842-1915) 목사의 전도를 받고 성경을 읽은 후, 중국 만주 영구(營口)장로교회를 찾아가서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2019년은 한국개신교 140주년인가?1984년에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할 때까지는 선교사를 주체로 보는 선교사관에 따라서 선교사를 통한 복음 전래를 개신교 시작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첫 주재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서울에 온 1884년 9월 22일을 기점.. 한국기독교사 공부 전망: 장단점과 어학 준비 한국교회사를 전공하려는 후배들에게한국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는 장단점과 어학 준비1. 장점(1) 기존 연구가 별로 없어 한 20년 정진하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제대로 하면 30년 만에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다.(2) 한국교회가 점차 고령화되고 역사가 길어지면서 연구 주제와 일반교인의 수요가 늘고 있다. (지금 해방 이후 연구 주력)(3) 한반도+ (중국 + 일본 + 미국+ )이라는 공간에서 발생한 근현대 역사는 세계인들도 흥미를 느낄 주제가 많다.(4) 통일 시대에 남북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중요한 고리가 기독교이고, 해방 이전 +1950년대+ 1970년대 이후 북한 기독교 역사이다. 2. 단점(1) 학문 수준이 낮다: 기존 연구 부족으로 세계 기독교사나 중국 기독교사에 비해 그 수준이 낮아, .. 1919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 [이 한 장의 사진]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인 대표단과 아인슈타인. 오른쪽 앉은 이가 김규식.다음 필라델피아 한국인 유학생회가 발행한 잡지에 실렸다.이 월간지는 삼일운동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자료이다. 1면에 헐버트의 글이 실렸다. 1919 숨어 있는 선교사 [삼일운동과 선교사의 사전 참여 문제] 숨어 있는 선교사 일제 경찰은 기독교인 시위 뒤에는 선교사의 지시, 가르침, 도움 등 직접 연관이 있다고 믿고, 평양 숭실의 모우리를 구금하고 2주일간 심문했다. 대부분 선교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선교사 집에서 선언문을 등사하고, 시위를 계획하고, 연락하고, 시위를 주동하는 행동대원이었으며, 시위 후에도 선교사 집에 숨어 있었기에, 그 관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왜 일제는 그 연관성을 밝히려고 그렇게 노력했을까?선교사들은 이구동성 시종일관 그 연관성을 부정했다. 사전 인지를 극구 부인했다. 왜?요즘 기독교인들은 삼일운동과 선교사와의 연관성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선교사가 제국성을 벗고 민족성을 가진다고 보는 모양이다. 어제 피디도 나에게 심증을 넘어 다른.. 詩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詩(문학과 음악)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1.유교 五經의 시작은 공자가 편찬한 옛 시들로 이루어 진 詩經이다. 공자는 311편(305편)의 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노송 경편’에 등장하는 ‘사무사’ 구절을 인용하여 “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역시 공자는 술이불찬(述而不贊)의 자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로 낙빈 속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인간성의 가치를 믿고 사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와 음악의 대가였다.자공이 말하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께서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되 [도를] 즐거워하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詩經에서 ‘곧 잘라 놓은 듯,.. 1949. 3. 1절 30주년 김구 주석의 기념사 조선일보, 1949년 3월 1일자 우리는 이제 三十周의 三·一節을 마지하게 되었다. 도라보건대 三十年前 이 날은 우리 조국이 倭敵의 暴壓과 搾取 下에서 可憐한 同胞들이 膏血을 빨리고 生命까지 빼앗긴 일은 있었지만 少數의 倭敵의 走狗를 除하고는 同族끼리 殺害한 일은 없었든 것이다. 우리는 倭敵을 打倒하고 祖國의 自主獨立을 奪還하자는 가장 勇敢하고도 가장 革命的인 目的을 爲하여 全 民族이 一致團結하여 共同爭鬪하였든 것이다. [중략]嚴肅한 良心이 命하는대로 愛國愛族의 三一精神으로써 完全 自主의 獨立祖國을 再建하기를 또 한 번 새롭게 決心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決心을 實現하기 위하여 平和的 手段으로써 祖國의 統一 獨立을 完遂하자. 우리가 政治上의 獨立을 達成하여도 經營上의 破滅을 謀免하려 하여도 唯一.. 이전 1 ··· 86 87 88 89 90 91 92 ··· 9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