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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의주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유여대 목사의 평양 장신 졸업 때 모습, 1915년의주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순서는 (1) 찬미가, (2) 기도, (3) 식사(式辭), (4) 선언서 낭독, (5) 독립 창가 합창, (6) 만세, (7) 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한국교회와 초대형교회의 미래 옥성득, "한국교회와 초대형교회의 미래," , 2018년 11월 23일https://cemk.org/10631/페이팔(Paypal)을 만든 피터 틸(Peter A. Thiel)과 블레이크 매스터스의 『제로 투 원』(2014)을 읽으며 충격을, 그리고 약간의 영감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 無(Zero)에서 출발하여 유일한 기업(One)이 되어야 하고, 기업은 경쟁 대신에 혁신적 기술로써 독점을 해야 산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Zero to One』에서 피터 틸은 초대형 기업의 4대 특징이 ①독자 기술, ②네트워크 효과, ③규모의 경제, ④브랜드 전략이라고 했다. 이런 특징들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초대형교회는 제일 중요한 독자적 기술은 해외 초대형교회에서 수입하고, 규모의 경제와 브랜드 전략으로 성장한 후..
1919 함흥 3 · 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김승태, 함흥에서의 3 · 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 기독교사상 (2018.6): 96-105. 함흥 3·1운동함흥에서의 3・1운동 준비는 1919년 2월 25일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만세시위는 3월 3일 함흥 장날에 시작되어 6일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을 주동자들의 재판 기록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2월 25일 원산 광석동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인 이순영(李順榮)은 함흥 중하리예배당(함흥남부교회)에 와서 함흥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초치하여, “현금(現今) 세계의 대세는 민족자결의 기운으로 향하고 우리 조선 민족도 열국 강화회의의 문제에 포용(包容)하게 함으로써 차제(此際)에 나아가서 조선독립의 청원서를 동(同)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급무(急務)”라는 요지의 연설을 ..
1955 첫 여자목사 전밀라 1955 감리회 첫 여자목사 전밀라 한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 목사로 안수 받은 전밀라 여사 재건교회 최덕지는 1955년 5월 2일 목사로 안수 받아, 전 목사가 약 두 달 먼저 안수를 받았다. 재건 총회는 당시 회의록을 근거로 최덕지 목사가 1955년 5월 4일에 김영숙, 김소갑숙과 함께 목사 안수 받은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모든 자료는 안수 받기 전 명예목사로 호칭한 것을 목사 안수와 혼동하여 사용했다. 1955년 3월 16일 안수식 장면, 참으로 소박하다. 장로교회는 기장 1974년, 예장 통합 1996년에 첫 여자 목사 안수를 주었고, 성결교회는 2004년, 기하성(순복음)은 2007년에 안수를 주었다. 그러나 예장 합동은 아직 안수가 불가하다. 작년에는 여학생의 신학생 입학도 불가하다고 하..
1955 재건교회 첫 여자 목사 최덕지 1955년 재건교회 첫 여자 목사로 안수 받은 최덕지 최덕지 목사 민족운동, 여성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교회재건운동의 기수이자 첫 한국인 여자 목사의 한 명인 최덕지 여사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뒷줄 중앙이 최덕지, 1936년 경남노회 순회 전도사 시절 [출처: http://www.hanryeo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78] 1920년대에는 통영의 유곽을 보고 공창 폐지 운동을 전개하여 여성 권익을 신장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 여전도회 회장으로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핍박을 견디며 7년 성상을 투쟁하다가 옥중성도로 해방을 맞이하고 해방 이후에는 가장 강경한 교회 재건운동, 신사참배 회개 운동을 전개한 한국교회의 지도..
1919 평양 삼일운동과 김선두 목사 김승태, “평양에서의 3・1운동과 김선두 목사,” 「기독교사상」 2018년 5월호. 91-100. 평양 3·1운동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교회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으로 1,000여 명이 모여 광무황제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봉도식에 이은 독립선언식에서는 단상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를 담임하던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외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일선(丁一善)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던 강규찬(姜奎燦) 목사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서 윤원삼의 만세 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의 교사와 학..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 이상규,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 코람데오닷컴 (2016. 10. 7)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86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술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앞서간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고, 둘째는 앞서간 손양원 목사를 기억하고 그 분이 남기 신앙 정신과 그 유산을 본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 두 사람을 말한다면 주기철..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장규식,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26 (2006년 겨울): 84-97. ‘분단 극복'의 지평에서 다시 읽어야 할 조만식자그마한 키에 무릎을 치는 깡똥한 검정 무명 두루마기, 말총 모자에 편리화,박박 깎은 머리에 수물수물 얽은 얼굴,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 지인들이 떠올리는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의 모습이다. 고당 조만식(1883- 1950)은 흔히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에 비견된다. 상인 집안 내지 그 카스트 출신으로 식민 본국의 심장부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한 이력이라든지, 일상에서 몸소 토산 장려의 모범을 보이며 민중의 교사로 나선 점에서, 그리고 강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비폭력 무저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간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