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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 대한독립만세 선교사들은 여러 지역의 삼일운동 목격담을 이런 보고서로 132 쪽을 만들어 뉴욕 등으로 보냈다. 여기에 올린 부분은 그 첫 부분으로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열린 장로회 교인들의 독립 만세 장면을 보고한 번하이젤 선교사의 보고서 앞 부분이다. 이 부분의 설명에 대해서는 김승태, "평양에서의 삼일운동과 김선두 목사"를 보라.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98?category=818327 위 부분을 타이핑 transcription하면 다음과 같다. The Independnece Movement in ChosenPyeng Yang, Chosen, March 1st, 1919 This has been a memorable day in the history ..
목포 일본인 신시가지, 1910년대 [이 사진 한 장] 목포 일본인 신시가지, 1910년대바닷가 언덕에 일본인들을 위해 신사를 설치했다. 직각으로 신작로를 내고 일본인 거주지를 만들었다. 엽서 왼쪽으로 더 나가면 한국인 구 읍이 있고, 그 안에 선교 학교와 병원과 교회가 있었다.모든 식민지 도시는 이렇게 공간이 이분화, 서열화 되었다. 기독교는 민중이 사는 한국인 지역에 위치했다.
박문약례 [박문약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글은 널리 의례는 간단히"로 해석한다. 폭넓은 지식, 간단한 예식.학문은 좌우상하 사방으로 넓히되, 예식은 약소하게 하라. 마음은 채우되, 행동은 비워서 간단명료하게 하라. 이 점에서 보면 오늘 한국 교회는 거꾸로 간다.박문 대신 일자 무식이다. 21세기 교회를 둘러싼 다양한 사조, 철학, 사회적 이슈에 대해 신학적 숙고와 연구가 필요하다. 공부할 책도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박문은 포기한 목사가 많다. 오로지 한 신학자만 받드는 單文 외골 교수도 많다. 책 한 권이면 족하다며 성경만 읽는 一冊 신자도 많다. 약례 대신 허례로 갔다. 예배당과 예배 의식만 화려하다. 예배도 너무 많다. 설교도 지나치게 많다. 공연하고 춤추고 찬양하면 세상이 변할 줄 알고, 호..
증도의 전도사 문준경 문준경(文俊卿, 1891-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631 1891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17살 때인 1908년 3월 결혼했지만 남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에서 기독교에 가입하고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부터 신안군 지역을 순회하며 증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지역을 순회하는 도중 주민들의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했고, 여러 섬들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1943년 일제의 종교탄압이 증동리교회에도 ..
1919 의주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유여대 목사의 평양 장신 졸업 때 모습, 1915년의주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순서는 (1) 찬미가, (2) 기도, (3) 식사(式辭), (4) 선언서 낭독, (5) 독립 창가 합창, (6) 만세, (7) 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한국교회와 초대형교회의 미래 옥성득, "한국교회와 초대형교회의 미래," , 2018년 11월 23일https://cemk.org/10631/페이팔(Paypal)을 만든 피터 틸(Peter A. Thiel)과 블레이크 매스터스의 『제로 투 원』(2014)을 읽으며 충격을, 그리고 약간의 영감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 無(Zero)에서 출발하여 유일한 기업(One)이 되어야 하고, 기업은 경쟁 대신에 혁신적 기술로써 독점을 해야 산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Zero to One』에서 피터 틸은 초대형 기업의 4대 특징이 ①독자 기술, ②네트워크 효과, ③규모의 경제, ④브랜드 전략이라고 했다. 이런 특징들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초대형교회는 제일 중요한 독자적 기술은 해외 초대형교회에서 수입하고, 규모의 경제와 브랜드 전략으로 성장한 후..
1919 함흥 3 · 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김승태, 함흥에서의 3 · 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 기독교사상 (2018.6): 96-105. 함흥 3·1운동함흥에서의 3・1운동 준비는 1919년 2월 25일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만세시위는 3월 3일 함흥 장날에 시작되어 6일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을 주동자들의 재판 기록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2월 25일 원산 광석동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인 이순영(李順榮)은 함흥 중하리예배당(함흥남부교회)에 와서 함흥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초치하여, “현금(現今) 세계의 대세는 민족자결의 기운으로 향하고 우리 조선 민족도 열국 강화회의의 문제에 포용(包容)하게 함으로써 차제(此際)에 나아가서 조선독립의 청원서를 동(同)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급무(急務)”라는 요지의 연설을 ..
1955 첫 여자목사 전밀라 1955 감리회 첫 여자목사 전밀라 한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 목사로 안수 받은 전밀라 여사 재건교회 최덕지는 1955년 5월 2일 목사로 안수 받아, 전 목사가 약 두 달 먼저 안수를 받았다. 재건 총회는 당시 회의록을 근거로 최덕지 목사가 1955년 5월 4일에 김영숙, 김소갑숙과 함께 목사 안수 받은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모든 자료는 안수 받기 전 명예목사로 호칭한 것을 목사 안수와 혼동하여 사용했다. 1955년 3월 16일 안수식 장면, 참으로 소박하다. 장로교회는 기장 1974년, 예장 통합 1996년에 첫 여자 목사 안수를 주었고, 성결교회는 2004년, 기하성(순복음)은 2007년에 안수를 주었다. 그러나 예장 합동은 아직 안수가 불가하다. 작년에는 여학생의 신학생 입학도 불가하다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