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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5일 김교신 별세 발진티푸스에 감염, 급서(急逝)하다.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며 승천하듯 해방 직전에 별세하니, 아깝고 통절! --- 노평구, "김교신 선생 해적이," 17 (1974년), 19.​45년 45세에 돌아가신 지 20년, 1974년에 은 김교신 특집을 꾸몄다.그 표지와 안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올린다. 1938년 양정고보 앨범에 실린 친필, "己所欲 施於人"공자의 말을 긍정문으로 표현한 예수의 말씀이다. 공자의 말이나 예수의 말이나 같은 뜻이다. 선비 김교신의 곧은 정신이 담긴 달필이다. 80년 전 한 선비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손기정을 만들고일기를 쓰고 성서를 가르치고 을 만들며, 성서 위에 조선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가셨다. ​역사는 믿는 바 大義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그 피땀의 ..
1919년 3월 1일 첫 독립 만세를 부른 곳은 평양 1919년 3월 1일 첫 독립 만세를 부른 곳은 평양3월 1일 만세 시위지는 일곱 곳뿐이었다. 시간대 별로 보면 평양 1시에 이어 2시에 서울, 선천, 의주, 진남포, 원산, 5시에 안주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참가한 인원은 평양 3,000 여 명, 서울 3-4천명, 선천 1,000 여 명, 의주 1,000여 명, 원산 7,8백명, 진남포 500여 명, 안주 170-180명.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회 5(평양, 선천, 의주, 안주, 서울), 북감리회 3 (평양, 진남포, 서울), 남감리회 1(원산) 등이었다. 함흥(캐장)은 1일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2일에 시위가 발생했다. 따라서 평안도 평양-안주-선천-의주 지역 북장로회 교인들이 3,200명(평양 1,000 이상+ 선천 1,000 + 의주 1,00..
1911 새벽 묵상의 시간(晨更, QT) 시작 한국에서 새벽 묵상의 시간(晨更, QT)은1911년에 공식 시작 이상재 선생이 모트의 The Morning Watch 번역 존모트(John Mott)의 The Morning Watch (1898)의 한문본을 이상재 선생이 YMCA 청년들의 개인 경건을 위해서 번역편집하고 1911년 6월 30일에 출판했다. 이 아침 묵상법을 소개한 을 공부한 후, 매일 새벽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경건 운동을 시작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수신경(守晨更)이라고 했다. 수경=근신하여 지킨다는 뜻인데, 전통적으로 유학자나 도교인들은 밤에 자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전통이 한국에서는 새벽에 고치는 신경이 되었다. 修道 修身의 첫 걸음이 晨更 (새벽 신, 고칠 경)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영미에서 기독교인들은 새..
1953 방지일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 중 1953년 1월 19일 귀국하지 않고 순교의 각오로 중국 선교에 임하고 있는 방지일 목사 가족에 대한 보도.그는 이 기사 이후에도 4년 더 공산국 중국에 머물며 선교했다. 중국 최후의 외국인 선교사였다. 이것이 알려져 북한으로 추방되지 않고 남한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기사를 보면 195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 군함을 보내어 방목사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방 목사가 고별 인사를 하자 교인들이 울기 시작했고, 방목사는 차마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남기로 작정했다. 남한에서는 그가 조난 당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소식이 전해져서 이 기사가 실렸다.
1960 박형룡, 신신학을 이단 용공으로 공격 [신신학=이단 용공이라는 논리는 1960년에 나왔다] 얼마 전 한국교회 쇠퇴의 주요 요인으로 저녁예배 생략이 뜬금없이 지적되었다. 일종의 귀추 논리(abductive reasoning)이다. 1959년 박형룡 목사가 합동측을 분리한 후 1960년 광주에 갔을 때 통합측을 신신학 용공으로 비난하면서, 주일저녁 예배를 생략하는 것이 통합측 신신학의 한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박형룡 목사와 정규오 목사가 통합측의 신신학은 다음 9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인2. 지옥 부정3. 재림 부인4. 북한 목사는 전부 간첩이거나 공산당인데 받아들이면 용공주의5. 구호물품 받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6. 술 담배를 한다.7. 재혼해도 좋다 = 넓은 길을 간다.8. 교회에는 반드시 댄스홀이 있..
3.1운동과 태형과 평양 신학생들 십자가 태형 1912 조선 태형령이 부활되었는데, 이는 105인 사건 때 구속한 자들을 고문하기 위해서 였다. 이 고문형은 1919년까지 폐지되지 않아, 3.1운동 시위 참여자로 체포된 자들은 모두 태형에 처해 졌다. 30대, 40대, 60대, 90대 등에 처해 진 자들이 많았고, 이어서 징역 6개월, 1년, 2년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감옥에 보내지지 않고 마을 단위로 태형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다. 충남 아산군의 도고면과 선장면에서는 192명이 태형 40 혹은 60을 받았다. 다음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의 경우이다. 1919년 삼일운동 시위 참여자 수 천 명 십자 형틀에 묶고 태형 30대로 고문을 시행했다. 평양에서 신학생 몇 명은 태형 후 십자가틀을 매고 거리에서 끌려다녔다 ​ 1. 다음은 1912년 3월 ..
1884년 1월 26일 이수정의 편지 발간되다 이수정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 편지 뉴욕 기독교 주간지에 발표되다 일본에서 개종하고 1883년 말 미국교회에 보낸 이수정의 편지는 한국인이 직접 미국 선교사를 한국에 요청한 편지로서, 이 편지가 계기가 되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884년 헤론 의사와 언더우드 목사를 한국의 첫 선교사들로 임명하게 된다. 이수정은 당시 일본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려는 운동을 하자, 조선 양반 기독교인의 체통과 자존심에서 일본을 거친(second-hand) 기독교에 만족할 수 없었고, 미국에서 직수입되는 기독교를 받고자 했다. 그 편지 내용은 모든 교회사 첫 장에 등장하므로 요약하지는 않고 대신 영어 전문을 첨부한다. 그런데 사소한 것이지만 그 편지가 미국에서 언제 처음 출판되었는지 발표 시점을 아직도 정확히 모르는..
서상륜의 경력과 장진국 아직 풀지 못한 30년 전 숙제 서상륜 선생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선생이 쓴 회고문 자체에 오류가 많고, 여러 1차 자료들도 서로 다르며, 해방 이후에 쓴 2차 자료는 픽션이 더해져서 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지금도 위키백과의 서술은 오류 투성이이다. 그래도 대충 그의 생애를 알려면 일단 위키를 읽어보자.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83%81%EB%A5%9C 서상륜이 직접 쓴 "서선생 상륜의 경력," ,1901년 9월 9일자에 자신의 기독교 개종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이십칠년 전에 대청국 봉천성 우장당방 영구라 하는 항구의 여간 사소한 장사를 갔다가 뜻밖에 신병을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당하였나이다. 그때에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어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