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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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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정 대한민국 적십자회의 활동 1919년 삼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만행과 사상자 보고는 그 해 미국 신문에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적십자사 일본지부가 공정하게 보고했다면, 사상자나 피해 가옥 등이 제대로 알려졌을 것이다. 미국 적십자사가 한국인을 도우려고 했을 때 일본 정부는 거절했다. 그러나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대한민국 적십자회가 조직되자, 아래 신문 기사처럼 1920년 10-11월에 발생한 간도 대학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피해 상황을 보도했다. AP를 이를 인용하면서 전 세계에 한인의 피해와 일본의 만행을 알릴 수 있었다. 북간도 등에서 한 달 동안 25개 교회가 불탄 사실에서 보듯이, 간도의 한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했고, 일제는 철저히 교회를 불태우며 보복했다. 임정은..
이승만이 쓴 한글판 <일본내막기> 서문, 1954년 1954년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박마리아 역 국문판 (자유당선전부, 1954)에 실린 이승만이 쓴 서문 전문을 소개한다.
1930 봉천 조선인 예수교 교회 이훈구, (평양, 숭실전문대학 경제학교실, 1931), 224. 1930년 6월 말 현재 만주(동만주, 남만주)에 한인 개신교회는 172개, 교역자는 764명, 교인수는 10,328명, 학교 206개, 학생수 9,438명이었다. 이 가운데 아래 봉천교회가 가장 큰 교회였다. 그런데 1930년에 중국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우려하여 교회들을 일시 폐쇄했다. 집회를 통해 공산당 선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국민일보는 기고문을 신중하게 올려라 요즘 보도에 문제가 많다. 기고문 내용의 사실 확인 후에 게재하기 바란다. 아래 글은 가짜 뉴스에 가깝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47858&code=23111111&sid1=chr&fbclid=IwAR2zO47Zny-JX1xd0YV8nR8KR3kvm6c1Q0rmwTUTlLZEO24Mp8KCnxFyf_c ‘동성애 반대’ 성경 말씀 전했는데… 캐나다 대법원 혐오범죄 판결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는 대상 집단을 모욕(insulting) 비하(degrading) 멸시(abusive) 위협(threatening)하는 표현이 ‘모욕형 news.kmib.co.kr 1 위 글은 제목부터 문제이다. 어떻게 전했는가가 빠져 ..
1921 게일의 변화, 이상재의 기개 사람은 변한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연동교회의 게일(James S. Gale) 목사를 대표적인 친일 선교사로 보는 것이 통설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이상재 YMCA 총무가 삼일운동 이후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인 1921년, 친구 게일은 이상재를 진정한 애국자로 칭송하면서 쓴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 No!를 분명히 하고, 웃으면서 게일과 작별하고 당당히 감옥으로 갔다. "수많은 용감한 지사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겪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나와 같은 늙은 개가 어찌 [길에서] 놀면서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갈 때 이상재의 나이가 70세였다! 이상재는 1905년 55세에 회심하고 사람이 변했다. 이후 나라와 교회와 청년을 위해 헌신했다. Gal..
1918 북가주 Stockton 한인감리교회 1903년에 시작된 San Francisco 한인교회 이후 주변으로 흩어진 한인들이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아래 사진은 1918년 스탁톤한인감리교회이다. 1920년대에는 북가주, 남가주, 중가주에 걸쳐 많은 한인 교회가 존재했다. 그 역사가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 있지만, 본격적인 연구 조사는 필요하고 중요한 과업이다. , 여력이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이다. 누가 할 사람이 없을까? 세 사람 정도 2년 간 지방 도시 도서관들을 뒤지고, 공저로 쓰면 된다.
1934 감리교회 희년, 연대표 감리교회는 1934년 6월 매클레이 서울 방한을 기점으로 50주년을 기념했다. 아펜젤러나 스크랜턴으로 하면 장로교회에 뒤지기 때문에, 알렌이 온 1884년 9월보다 3개월 전인 6월에 방문한 매클레이를 기점으로 했다. 양주삼 감독이 무리하게 연도를 앞당겨 1934년 6월에 희년을 기념했다. 방문 선교사를 기점으로 하는 나라는 없다. (참고, 옥성득, (새물결플러스, 2016), 제4장 , pp. 58-91.) 장로교회에 대한 열등감으로 희년을 1년 앞당겼다. 1934년에는 거의 양주삼 감독 독주 체제였다. 그러다가 바로 신사참배 수용하고, 이후 몰락의 길로 갔다.
헬렌 켈러, 조선에 오다, 1937년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어릴 때 병에 걸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에 좌절치 않았습니다. 세상의 차별과 구조악을 보고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귀머거리, 소경, 좌파, 여자, 기독교인. 이 다섯 가지 소수자 조건에도 불구하고 1937년 7월 제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여러분은 나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때 쓴 내 편지를 읽어봅니다. “조선인 여러분, 나의 유일한 소원은 세계 평화와 인류애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앞뒤에 계시니, 아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만사는 뜻한 바대로 이루어집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조선의 맹아들을 도와서 그들의 불행으로 하여금 성공을 향한 층계가 되게 하여 사회의 유용한 부분으로서 제자리를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눈에 광명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