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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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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강원룡의 한국기독교 이해 강원룡, (조선기독교서회, 1949. 4. 20), 124쪽에 한국교회 70년사를 한 줄로 정리하고 있다. 발전에도 불구하고, 저속, 부패, 무권위. 다시 70년이 지난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발전에도 불구하고 저속하고 부패했고 사회적 신용도(사회적 자본) 바닥이다.
동성연애 첫 기사, 1921 신문 지상에는 일본인 여성들의 동성 연애 사건이 1921년부터 꾸준히 보도되었다. 1921년 일본어 신문인 『朝鮮時報』는 청주자혜병원 간호부 야카미 도키코(矢上, 22세)와 야브이 키쿠코(藪井, 23세)의 동성연애를 보도했는데, 필자가 아는 한 국내 발행 신문에서 동성연애 사건을 보도한 첫 사례였다. 낯선 외국 땅에서 한 병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자매처럼 지내다가 1921년 봄부터 밀회를 하다가 정사(情死)를 시도했고 해고되었다. 동성연애는 일본인들 가운데 시작되었는데, 한국인에 관한 기사는 1925년 이후에 주로 등장하며, 동성애로 인한 자살 기사는 1931년부터 나온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여학생들의 법정투쟁, <독립신문>, 1919. 11. 20 법정에서 삼일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검사를 주눅들게 한 여학생들. 삼일운동으로 6개월 이상 징역형에 처해진 여학생은, 유관순 외에도 40명이 넘는다. 이들이 법정에서 투쟁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옥성득, "여학생의 애국정신, 한국에서 돌아온 한 서양 여선교사 담, 29호 (상하이), 1919. 11. 20," (2023. 10): 14-16.
신갈교회 창립은 1901년 11월 , 2020. 7. 14를 보면 교회가 1900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일을 알 수 없어 교회가 임의로 3월 1일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제18회 북감리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에서 이천 구역 담당 선교사 스웨러(Wilbur C. Swearer)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 So Ko-ji" 항목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01년 11월 소고지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902년 봄 현재 학습인 27명, 세례교인 5명이었고, 곧 예배당 용도 집을 구입할 것이라고 했으므로, 이 말과 다음 몇 자료에 근거해서 소고지교회(신갈교회)는 1901년 11월 설립되었다고 하겠다. 소고지 구역은 이천 계삭회에 속했다. 1902년 5월호 "이천 계삭회" 기사는 소고지를 "쇽고지..
기후변화와 역병과 교회 1902년 7월 13일 “3년 만에 비가 처음 제대로 왔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초년병 선교사 웰번 부인의 일기에 나오는 이 한 줄을 읽고 나는 내 책 제2장, "구세주: 정감록 파자와 기독교 종말론," 메시아니즘과 한국 개신교를 제대로 쓸 수 있었다. 1900-1902년 3년간 중부 지방에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아 수확량은 1/10로 줄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고, 도적떼가 부자들을 습격했다. 세금이 걷히지 않자 고종은 매관매직을 늘리고, 탐관오리들은 호랑이보다 무섭게 곡식을 빼앗아 갔다. 살 수 없게 된 중부 지방의 농민들이 하와이 이민 열기에 몸을 의탁했다. 낙원이 있다네! 가보세! 1903년 보리농사마저 망쳤다. 곡식 값은 폭등했다. 정부는 월남에서 안남미를 수입해 풀었으나 역..
신채호, “帝國主義와 民族主義,” <대한매일신보>, 1909. 5. 28 원문 번역 (by 옥성득) 풍운이 일어나는 듯 홍수가 달리는 듯 번개가 울리는 듯 파도가 때리는 듯 불이 타는 듯 20세기 제국주의(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여! 신성한 먼로주의[내가 타인을 간섭하지 아니하고 타인도 나를 간섭하지 못하는 주의]가 백기를 한 번 든 후로 동서 대주에 소위 6대 강국이니 8대 강국이니 하는 열강이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이 제국주의를 숭배하며 모두 선두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여 이 제국주의에 굴복하여 세계 무대가 하나의 제국주의의 활극장을 이루었도다. 그런즉 이 제국주의를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로되 민족주의(타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의)를 분휘함이 이것이라. 이 민족주의는 실로 민족 보전의 절대적 진리다. 이 민족주의가 강건하면 나폴레옹(Napole..
안창호의 손글씨 엽서, 1925 (1) 들째아들 필선安必鮮에게 보낸 엽서, 1925. 4. 15 나는 덴버까지 왔고, 오늘은 시카고로 가겠다. 내가 심은 버드나무에 물을 좀 주어라. 네 아부지, 4월 15일. (2) 딸 수라에게 보낸 안창호의 엽서, 1925. 5. 23 내 딸 수라, 너는 잘 있느냐? 나는 평안하다. 내가 너를 보고 싶다. 내달에 집에 가겠다. 5월 23일, 네 아부지. 안창호는 삼일운동으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1919년 상하이로 떠났다. 1924년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북경에 ‘동포에게 고하는 글’ 작성하여 보냈다. 1925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왔는데, 이 엽서들은 미국에서 여러 도시를 돌면서 집에 가기 전에 자녀들을 그리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썼다.
1897 부활론 "부활론," , 1897. 4. 15.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앞서는 부활론의 하나. 성경에 없는, 누에가 변하여 나비가 되듯이. 메타모르포시스로(metamorphosis: 완전 變態 transformation)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