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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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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후 별세하신 분 내 주변이나 어떤 의미로든 내게 영향을 준 분들, 소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다. 지난 4년간 돌아가신 분을 정리해 보았다. 대개 학자나 목회자들이다. 민경석 교수, 1940. 8. 11 ~ 2020. 8. 11 (80세) 김홍도 목사, 1837. 2. 6 ~ 2020. 9. 2 (83세) 김용섭 교수, 1931. 10. 8 ~ 2020. 10. 20 (89세) 박순경 교수, 1923 ~ 2020. 10. 24 (98세) 박창환 교수, 1924. 3. 17 ~ 2020. 11. 15 (96세) Rev. George E. Ogle, ~ 2020. 11. 15 (91세) 김용복 교수, 1938. 11. 1 ~ 2021. 4. 7 (83세) 조용기 목사, 1936. 2. 14 ~ 2021. 9. 1..
1935 기독청년운동 진흥책 논의 "基督天道敎 兩大陣營 緊張, 三千萬 敎徒와 新首惱部 動向," 7-2 (1935년 2월): 18-35. 朝鮮 基督靑年運動 振興策 -아울너 聯合會 及 靑年會의 改造案- 이번에 朝鮮 基靑總務 申興雨, 副總務 玄東完 兩氏가 辭任하엿슴니다. 이 機會에 基督敎靑年運動을 크게 振興식히자는 소리가 全半島 社會에 놉허 감니다. 생각건대 10년 전만 하여도 3,000의 會員을 가젓고 또 30만원이란 巨額의 米國補助가 잇섯스며, 元老 李商在씨 配下에 卓越한 人材가 雲霓가치 모여, 이 땅 文化의 큰 貯水池의 任務를 다하여 오더니 엇지하야 오늘날은 그 100만원이란 巨大한 財團法人의 體軀를 가지고서도 會員數의 激減, 米國補助의 4,5만원 程度로의 激減, 그리고 生動하는 朝鮮社會 實情과는 차츰 流離되여 가고 말려는 傾向이 잇게 ..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무덤, 1924년 김구 선생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오른쪽이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왼쪽)과 함께 아내 최준례 여사 무덤을 찾았다.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백범기념관 제공). [출처 1]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내용을 풀이하려면 자음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이해하면 된다. 즉, 'ㄹ'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면 ㄱ-ㄴ-ㄷ에 이어 네 번째이니 '4'를 말한다. 최 여사의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 즉 1924년 1월 1일이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1919년 건국되었으므로 그런 연호를 사용했다. 다음은 블로그 “보림재”에서 퍼온 글이다. (출처 2) 하루는 신천 사평동(謝平..
1974 로잔 선언과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책임" [Lausanne Covenent, 1974] 50년 전 로잔 선언 지금도 세계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슈는 5항. 당시 로잔 관계자들은 한국의 박정희 유신 독재와 인권 문제도 로잔 대회를 특집으로 다룬 1974년 9월호 The Reformed Journal에서 거론했다. (아래 이미지 참조) 당시 한국 인구의 7%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박 정권의 유신 독재를 반대하며 항거했다. 로잔 선언이 없어도 항의했지만, 이 선언(비록 늦게 소개되었지만)으로 청년 복음주의자들의 의식이 깨이고 사회 참여에 나선 것이 1980년대 중반이다. ---------------- 5.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요,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
2023년 별세하신 분들 올해 별세하신 분 가운데 기독교인과 역사학자 중심으로 일부 선별했다. 목사와 학자는 대개 80대에 영면했다. 나의 선생님들도 몇 분 돌아가셨다. 외국인으로는 아마도 팀 켈러의 죽음을 많이 기억할 것이다.
1949년 강원룡의 한국기독교 이해 강원룡, (조선기독교서회, 1949. 4. 20), 124쪽에 한국교회 70년사를 한 줄로 정리하고 있다. 발전에도 불구하고, 저속, 부패, 무권위. 다시 70년이 지난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발전에도 불구하고 저속하고 부패했고 사회적 신용도(사회적 자본) 바닥이다.
동성연애 첫 기사, 1921 신문 지상에는 일본인 여성들의 동성 연애 사건이 1921년부터 꾸준히 보도되었다. 1921년 일본어 신문인 『朝鮮時報』는 청주자혜병원 간호부 야카미 도키코(矢上, 22세)와 야브이 키쿠코(藪井, 23세)의 동성연애를 보도했는데, 필자가 아는 한 국내 발행 신문에서 동성연애 사건을 보도한 첫 사례였다. 낯선 외국 땅에서 한 병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자매처럼 지내다가 1921년 봄부터 밀회를 하다가 정사(情死)를 시도했고 해고되었다. 동성연애는 일본인들 가운데 시작되었는데, 한국인에 관한 기사는 1925년 이후에 주로 등장하며, 동성애로 인한 자살 기사는 1931년부터 나온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여학생들의 법정투쟁, <독립신문>, 1919. 11. 20 법정에서 삼일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검사를 주눅들게 한 여학생들. 삼일운동으로 6개월 이상 징역형에 처해진 여학생은, 유관순 외에도 40명이 넘는다. 이들이 법정에서 투쟁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옥성득, "여학생의 애국정신, 한국에서 돌아온 한 서양 여선교사 담, 29호 (상하이), 1919. 11. 20," (2023. 10):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