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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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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함흥 철수 작전, 1950년 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크리스마스, 14,000명이 구원선 안에서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1. 흥남 철수 사진의 진실 (1950. 12. 22-24) 다음 첫 두 사진을 보면 흥남철수는 평온한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피난민이 승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영화 첫 부분은 너무 많이 틀렸다고 하면 곤란하다. 15일부터 시작된 철수 작전에는 군함과 상선 200여 척이 동원되었고, 에 나오는 철수 장면은 마지막 군 상선/화물선인 빅토리 호 승선을 좀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다큐가 아니다. 그러나 첫 사진만 가지고 혼란과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 22일 흥남항으로 갔다. 당시 ..
삼일운동 후 한국교회 방향 제언 “각 전도단에게 일언을 고함,” , 1920년 7월 8-9일. 심양초부(沁陽樵夫) 객년 소요(騷擾) 이후로 우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선 종교는 흡사(恰似)히 대악풍 폭우를 겪은 수림과 같아서, 혹은 회당문을 견쇄(堅鎖)하여 1개 텅 빈 건축물만 회춘을 고대하고, 엄립(儼立)한 자도 불소하고, 혹은 지도자를 잃어서 난마(亂麻)같이 얼크러진 교회도 있으며, 혹은 왈 불가형언의 참화를 입은 교회도 많은 것은 언필(言筆)을 의지하지 않아도 과거의 사실이 증언하는 바라. 그러나 교회가 □□□□□기 인류에 여하 정□□ 이익을 여□함인지는 □□ 하하한 필요가 무하거니와, 특히 조조에 재하여는 엄한 연후에 송백의 절(節)을 지한다 함과 같이 과거를 소고하고 현재를 관찰하며 미래를 추구하여 혹은 □□ 혹은 무형으로 막대..
1921년 6월 압록강 대안 지역 종교 통계 안동현, 집안현 등 압록강 건너 만주 지역 종교: 예수교인이 조직 훈련된 반면, 대종교와 천도교 계열 신종교는 포교소와 목회자 부족으로 비조직, 교인수도 신빙성이 없다. (당시 대안 지역 한인 인구는 6만 6천 여 명으로 인구의 약 10%가 종교인) “대안 종교별 신도수 (對岸 宗敎別 信徒數),” 『朝鮮日報』, 1921년 12월 2일. 금년 유월 조사한바 압록강(鴨綠江) 안(岸)에 이(移)한 조선인의 종교 급 종교유사단체(宗敎及 宗敎類似團體)를 계(界)한즉, 안동현(安東縣)에 예수교회당 3, 신도 753명 관전현(寬甸縣)에 예수교회당 3, 신도 65명 대도교(大道敎)에 교구실 3, 신도 165명 집안현(輯安縣)이 예수교회당 6, 신도 516명 대도교(大道敎) 교구실 7, 신도 1,597명 시천교(侍天敎)..
두레: 놀이하는 인간과 노동하는 인간의 조화 옥성득, "두레먹이와 두레난다," 85호 (2022년 11-12월): 12-15. 처용은 밤드리 놀았다. 두레꾼은 두레먹이로 놀았다. 잘 노는 사람, 잘 노는 문화, 안전하게 노는 문화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교회 분쟁, 난투극, 폭언, 망발의 시작, 1923년 사찰과 교회가 대형 건물 지으면서,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로 돈/재산 문제로 분쟁 신구 대결(청년층 대 노인층, 자유신학 대 보수신학, 한국인 대 선교사) 1923년 1월 서울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총무원과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사이에 사무실 문제로 난투극 4~10월 평양 장로교회, 서문외교회 건축 문제로 분규, 난투극, 김선두 목사 사임 5월 대구남성정교회 자치파(이만집 목사) 대 노회파(선교사파) 간 예배당 재산권 문제로 활극 11월에는 평양 회중교회 재산권 문제로 분쟁 1924년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지속되면서, 평양 예수교를 비판하는 「開闢』지의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 등장 군산, 재령, 해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서 반기독교 운동과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 전개.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김익두를..
제1회 종교간 대화, 1965년 "韓國 諸宗敎의共同課題: 6大 宗敎 代表가 모인 討論에서" , 1965년 10월 21일. 韓國化·現代化되어야|親睦·聯合硏究·社會參與다짐 韓國「크리스찬·아카데미」가 주최한 「韓國諸宗敎의 共同課題」에 대한 국내 6대 종교 대표의 「대화」가 18·19일 이틀에 걸쳐 龍堂山「호텔」에서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종교각계의 대표 2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共同의廣場」을 마련한 이 토론회는 李能嘉스님(佛敎)·黃溫順여사(圓佛敎)·柳承國교수(儒敎)·朴養雲신부(가톨릭敎)·白世明씨(天道敎)·金在俊목사(프로테스탄트) 등의 자기 종교를 대변한 發題강연에 이어 社會參與、信仰의 自由 등 7개 항에 걸친 대화를 나누었다。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시종 겸양의 덕을 보인 이들은 타종교와의 친목과 연합적인 연구와 사회참여를 위한 기회를..
박인덕의 징병제 지지, 1942년 5월 일제는 1938년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고, 1944년징병제를 실시했다. 1942년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발표하자 5월에는 기독교인들도 지지 대회를 개최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성 인사 중 '조선의 노라' 박인덕(창씨개명 永河仁德, 1896 ~1980)은 5월 19일 서울 중앙예배당에서 열린 감리교단 경성교구 주최 징병제 지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2년 후에 실시될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덕화여숙 교장이었다. , 1942년 6월 3일. 박인덕은 3.1운동으로 감옥 생활을 하는 항일 노선에서 1930년대말부터 친일 노선으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 활동을 했다. 아래는 그녀의 생일을 제목으로 한 1952년 책 표지. 성을 PAHK으로 했다. 덧) 이 책은 박인덕이 얼마나 영어를 잘 했는..
박인덕 고황경의 징병제 지지 글, 1943년 다음은 朝鮮金融組合聯合會가 발행한 제70호(1943년 10월 1일)에 실린 박인덕과 고황경의 글이다. 자녀 교육에 대한 권면에서 자녀들을 잘 길러서 국가가 원할 때 희생이 되더라도 징병제에 따라 황군으로 바칠 것을 주장했다. 개인이나 집안의 보물을 넘어 국가에 필요한 군인을 기르는 게 어머니의 최고 의무라고 강변했다. 국가주의, 제국주의 자녀관이요 어머니관이었다. 마지막 광고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