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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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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Korea for Christ George T. B. Davis는 백만구령구령운동(Million Soul Movement) 당시 한국을 방문하고, 대부흥의 열기가 대전도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책 Korea for Christ 안에 담긴 여러 사진은 1909년 한국 교회의 여러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외에도 더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을 찾으면 초기 한국교회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 안에 있는 모든 사진을 올린다.
1914 조선성공회 한국인 첫 사제(김마가, 구바나바)와 트롤로프 주교 Mark Napier Trollope, a nephew of the British novelist, was consecrated as the third Anglican Bishop of Korea in 1911. He sits here with the first Korean ordinands, in 1914.
1921 전주 남자성경학교 남자성경학교, 여자성경학교가 자리를 잡아가던 때의 모습이다. 한해에 30일간, 이어서 두 달 간, 이어서 6개월 수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신도 지도자 훈련이었다. 1920년대는 한국에서 '민중'을 발견하는 시대였다. 교회에서는 평신도 훈련과 사역이 증가했다.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1-9 지난 4년 간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시리즈가 9권이 나왔다. 서울신학대학교 박명수 교수가 중심이 된 연구팀이 만들어 낸 성과이다. 해방 정국에서 개신교의 역할과 위치를 알 수 있는 책들이다. 연구자들이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리했지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논문들이 모여졌다.
1882-85 로스역 번역팀 다음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편, (1989년 초판), 149쪽을 보면 [이후 개정판이 나와 페이지가 바뀌었다] 1882-85년 로스역본 한글 신약전서 번역에 참여한 다양한 한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자료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학자로만 표현되어 있다. 잘 알려진 번역인 이응찬을 제외하면, 전도인으로 활동한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 이성하, 김청송(식자공), 류춘천 외에 우리가 아는 이름은 없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듯이 번역에는 여러 다른 한국인이 참여했다. 특히 평안도 사투리를 해결하기 위해, 1882년 7월에 세례를 받은 서울의 전직 관리, 복음서~고린도서를 개정 번역한 서울 학자, 임오군란으로 좌천된 서울의 보수파 군인들과 서울 출신의 양반, 서간도 한인촌 학자들이 참여했다. 사실 이 책의 "2. 만주..
광주 선교지부, 1949년 Presbyterian Meeting (Florence Root, Dr. & Mrs. Knox, Mary Dodson, Anna McQueen, Petrie Mitchell, Mary Belle Mitchell, Mrs. & Dr. Talmage, Mrs. & Mr. Miller) - Kwangju, Korea, 1949
합방과 병합의 차이 한일합방, 한일병합 등으로 혼용하지만 뜻은 다르다. 병합론자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 합방이란 말로 미화했다. The Japanese one-sided way of annexation of Korea (heigō 併合), rather than a more equal “union” (gappō 合邦), happened in the name of Pan-Asianism in 1910. See Tarui Tōkichi's 樽井藤吉 (1850–1922) treatise (Daitō Gappō-ron, Union of the Great East) in 1893. Tarui Tokichi argued that Japan and Korea could form a nation called "Daito" on an..
호떡 기자, 1923 1923년 2월 에 실린 "평양 만필" 후반부이다. 지방지방에 나가보면 소위 호떡 신문기자라는 것이 흔하다. 그것은, 무슨무슨 신문지국의 기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단니면서, 호떡 굽는 데로나, 다니면서, 사건탐방한다는 의미이다. 작년 11월 경의 일이다. 平壤의 박모라는 청년이, 일시 유혹에 빠저서, 명예상 불이익하게된 어떤 사실을 원고지에 젹어가지고 當者인 박모에게 가서, 돈 50원을 주면, 암암리에 무더 바리겟다고 한 신문기자 박모가 잇섯다. 그 때에 박모는<76> 50원을 거절하엿다는대 수일 후에, OO일보 제 3면에, 「美人計詐欺賭博」이라는 題下에 사실의 몃 배를 늘여서 게재된 일이 잇섯다고 한다. OO일보 平南支局의 기자라는 간판을 내여노코, 「그대의 사실을 내이는 것이 조흐냐, 안내이는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