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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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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1-9 지난 4년 간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시리즈가 9권이 나왔다. 서울신학대학교 박명수 교수가 중심이 된 연구팀이 만들어 낸 성과이다. 해방 정국에서 개신교의 역할과 위치를 알 수 있는 책들이다. 연구자들이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리했지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논문들이 모여졌다.
1882-85 로스역 번역팀 다음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편, (1989년 초판), 149쪽을 보면 [이후 개정판이 나와 페이지가 바뀌었다] 1882-85년 로스역본 한글 신약전서 번역에 참여한 다양한 한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자료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학자로만 표현되어 있다. 잘 알려진 번역인 이응찬을 제외하면, 전도인으로 활동한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 이성하, 김청송(식자공), 류춘천 외에 우리가 아는 이름은 없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듯이 번역에는 여러 다른 한국인이 참여했다. 특히 평안도 사투리를 해결하기 위해, 1882년 7월에 세례를 받은 서울의 전직 관리, 복음서~고린도서를 개정 번역한 서울 학자, 임오군란으로 좌천된 서울의 보수파 군인들과 서울 출신의 양반, 서간도 한인촌 학자들이 참여했다. 사실 이 책의 "2. 만주..
광주 선교지부, 1949년 Presbyterian Meeting (Florence Root, Dr. & Mrs. Knox, Mary Dodson, Anna McQueen, Petrie Mitchell, Mary Belle Mitchell, Mrs. & Dr. Talmage, Mrs. & Mr. Miller) - Kwangju, Korea, 1949
합방과 병합의 차이 한일합방, 한일병합 등으로 혼용하지만 뜻은 다르다. 병합론자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 합방이란 말로 미화했다. The Japanese one-sided way of annexation of Korea (heigō 併合), rather than a more equal “union” (gappō 合邦), happened in the name of Pan-Asianism in 1910. See Tarui Tōkichi's 樽井藤吉 (1850–1922) treatise (Daitō Gappō-ron, Union of the Great East) in 1893. Tarui Tokichi argued that Japan and Korea could form a nation called "Daito" on an..
호떡 기자, 1923 1923년 2월 에 실린 "평양 만필" 후반부이다. 지방지방에 나가보면 소위 호떡 신문기자라는 것이 흔하다. 그것은, 무슨무슨 신문지국의 기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단니면서, 호떡 굽는 데로나, 다니면서, 사건탐방한다는 의미이다. 작년 11월 경의 일이다. 平壤의 박모라는 청년이, 일시 유혹에 빠저서, 명예상 불이익하게된 어떤 사실을 원고지에 젹어가지고 當者인 박모에게 가서, 돈 50원을 주면, 암암리에 무더 바리겟다고 한 신문기자 박모가 잇섯다. 그 때에 박모는<76> 50원을 거절하엿다는대 수일 후에, OO일보 제 3면에, 「美人計詐欺賭博」이라는 題下에 사실의 몃 배를 늘여서 게재된 일이 잇섯다고 한다. OO일보 平南支局의 기자라는 간판을 내여노코, 「그대의 사실을 내이는 것이 조흐냐, 안내이는 것이 ..
60년대 분신자살(소신공양) 1. 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틱꽝득, 1897년 ~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승려로 월남(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에 항의해 소신공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남베트남 사회의 공분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식을 불러와 베트남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른 불승들도 그를 따라 월남 정부의 불교 탄압을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는데, 억눌린 민중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월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1967년에는 여승도 분신에 참여했다.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분신(소신)을 통해 부처에게 공양하는 소신공양이 있었다. 《묘법연화경》에서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던..
1924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박복영 선생 아래 박창수 박사의 글에서 앞 부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1924년 암태도 소작 쟁의를 실제적으로 이끌었던 박복영에 대한 글이다. 일부 사실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지만 1924년 8월 30일, 지주 문재철과 담판을 하여 소작인들에게 유리한 여러 조항을 받아낸 인물이다. 박창수, "박복영 선생과 문준경 전도사- 사회적 책임과 전도가 용서와 만날 때," , 2012. 1. 17. http://www.jabbey.org/bbs/bbs/board.php?bo_table=common&wr_id=2904&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72 박복영(朴福永, 1890-1973)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암태도에서 태어났..
1984 영락교회 주보 건물과 사람을 자랑하는 영락교회 주보 1면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대표하는 영락교회 주보 1면이다. 뒷 면 헌금 강조에서 보듯이 이때 성장, 교세, 힘을 자랑하지 않고, 미래를 직시하고 내실을 위해 신학교 투자, 성도 훈련, 민주화와 통일 운동 등 복음주의 사회 참여 신학을 발전시켰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쇠퇴는 없었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성장과 행사에 취해서 방향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