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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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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길선주의 개종 동기 길선주의 개종 동기길선주는 도교 수행자였던 김종섭을 통해 개종했다. 1898년 영수가 된 길선주는 탁월한 설교자였다. 예화를 적절히 사용하며 회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1901년 방기창과 함께 브라운 총무로부터 장로 안수를 받고, 매주 사흘은 선교사를 도와 전도하고 사흘은 교인들을 가르쳤다. 1902년 조사가 되어 신축한 장대현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길진경의 『영계 길선주』(1980)는 개종 동기를 청일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과 선도를 성취하는 예수교의 우월성으로 설명하지만, 천주교 신부의 토지 수탈 문제도 언급했다. 1896년 봄 피난에서 돌아온 길선주는 신축한 천주교 성당이 자신의 토지 800평을 차지하자 프랑스 신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일곱 번의 재판 끝에 장대현교회 ..
1910 이승만의 <독립정신> [2월의 책] 이승만, , 샌프란시스코, 신대동서관, 1910년 2월.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집필, 6개월 만에 원고를 완성했다. 나중에 미국에 와서 일부를 수정하여 1910년 샌프란시스코 신대동서관에서 출판했다. 무려 477쪽이나 되는 책으로, 1860년대 이후 한국 근대사를 독립의 관점에서 정리한 건국론이다. 255-257쪽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 개항하는 강화도 조일통상조약을 다룬다. 국제법적으로 보면 조선은 1876년 이 조약으로 독립국으로 인정되었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독립을 상실했다. [그리고 1919년 독립을 선언했고, 1945년 독립을 위한 식민지 해방과 1948년 정부 수립에 의한 독립(건국)이 이루어졌다.] 그가 1904년에 독립 정..
이승만 미화 지나치면 독이다 [지나친 역사 미화는 독이다]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이 호 목사)가 며칠 전 뉴욕 프라미스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승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를 “세기적인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했다. “1899년 1월, 추운 겨울날 조선의 중죄수만 가두는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회심한다. 조선의 양반가운데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팔도에 예수 믿는 사람은 40명, 남자 가운데는 백정, 여자 가운데는 기생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대접을 받는 양반 가운데 단 한명 이승만은 회심하고 가슴에 민족복음화의 꿈을 가진다. 예수 믿은 그날부터 이승만은 조선에 1백만 명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1) 1899년 1월 당시 조선 팔도에 개신교 신자가 40명? (2) 그것도 백정과 ..
1925 이승만 박사 李承晩博士는 渾身都是熱 金一善이러케 鐘路를 거처서 청년회관을 오면 李박사 생각이 別로 간졀해짐니다. 정말로 公번 띄고 私心업고, 혼신이 도모지 열정 떵어리인 李박사! 그야말로 愛國愛民의 열렬한 志士요 烈士임니다.일즉이 海州에서 생장하야, 자기 아버지를 쪼차 京城에 드러오기는 아마 16,7세이엿슬 듯함니다. 본래 漢文에 능한 그는 培材學堂에 드러가 영어를 중심으로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丁酉年頃에 徐載弼박사가 독립신문을 發刋할때에는 그 社에 논설기자로 드러가서, 독립이상의 고취에 盡力하얏슴니다. 독립협회라 하며, 만민공동회라 하면 더 말할 것 업시 近世의 조선에서 처음 닐어난 유일한 민간정당으로서, 당시에 宮中府中을 蕭淸하고, 민간사회를 혁신하기에 얼마마한 활약을 하엿는가하는 것은 이제 군더덕이로 말할 것 ..
Shepping(서서평)의 짧은 전기, 1937년 Lois Hawkes Swinehart, "Elise Johanna Shepping," complied by Hallie P. Winsbrough and edited by Sarah L. V. Timmons, Glorious Living: Informal Sketches of Seven Women Missionari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U. S. (Committee on Woman's Work, PCUS, Atlana, GA, 1937), pp. 145-186. 1937년 남장로회 여자 선교사 스와윈하트가 유려한 필체로 쓴 쉐핑(서서평, 1880-1934)의 짧은 전기가 미국 남장로회의 대표적인 7명의 여자 선교사들의 생애를 소개하는 Glorious Living의 제3장..
1964 스코필드의 마지막 말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48년간 일생을 바친 스코필드(石虎弼) 의사 한국에 호랑이가 두 마리 있는데 한 마리는 창경원에 있고 한 마리는 자신이라며 한국 교회를 향해 일갈! 1964년 봄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 "한국교횐 정신 차리라!" 한국교회가 교회 구실을 하지 않아서 땅에 떨어져 밟히고 있다. "한국교회 교인은 믿지 않는 사람과 비교할 때 무엇으로 분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민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남 핑계를 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려면 첫째, 하나님을 믿고, 둘째, 유머, 셋째, 인내, 넷째, 포켓머니가 있어야 한다.
1940년 2월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1940년 2월 5일 산정현교회 교인 1천명, 주변 교회 교인들과 시민 약 1천명, 합 2000명 앞에서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 주기철 목사, 1937년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4번)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9번)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
1945년 4월 25일 김교신 별세 발진티푸스에 감염, 급서(急逝)하다.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며 승천하듯 해방 직전에 별세하니, 아깝고 통절! --- 노평구, "김교신 선생 해적이," 17 (1974년), 19.​45년 45세에 돌아가신 지 20년, 1974년에 은 김교신 특집을 꾸몄다.그 표지와 안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올린다. 1938년 양정고보 앨범에 실린 친필, "己所欲 施於人"공자의 말을 긍정문으로 표현한 예수의 말씀이다. 공자의 말이나 예수의 말이나 같은 뜻이다. 선비 김교신의 곧은 정신이 담긴 달필이다. 80년 전 한 선비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손기정을 만들고일기를 쓰고 성서를 가르치고 을 만들며, 성서 위에 조선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가셨다. ​역사는 믿는 바 大義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그 피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