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87)
1940년 2월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1940년 2월 5일 산정현교회 교인 1천명, 주변 교회 교인들과 시민 약 1천명, 합 2000명 앞에서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 주기철 목사, 1937년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4번)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9번)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
1945년 4월 25일 김교신 별세 발진티푸스에 감염, 급서(急逝)하다.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며 승천하듯 해방 직전에 별세하니, 아깝고 통절! --- 노평구, "김교신 선생 해적이," 17 (1974년), 19.​45년 45세에 돌아가신 지 20년, 1974년에 은 김교신 특집을 꾸몄다.그 표지와 안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올린다. 1938년 양정고보 앨범에 실린 친필, "己所欲 施於人"공자의 말을 긍정문으로 표현한 예수의 말씀이다. 공자의 말이나 예수의 말이나 같은 뜻이다. 선비 김교신의 곧은 정신이 담긴 달필이다. 80년 전 한 선비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손기정을 만들고일기를 쓰고 성서를 가르치고 을 만들며, 성서 위에 조선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가셨다. ​역사는 믿는 바 大義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그 피땀의 ..
서상륜의 경력과 장진국 아직 풀지 못한 30년 전 숙제 서상륜 선생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선생이 쓴 회고문 자체에 오류가 많고, 여러 1차 자료들도 서로 다르며, 해방 이후에 쓴 2차 자료는 픽션이 더해져서 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지금도 위키백과의 서술은 오류 투성이이다. 그래도 대충 그의 생애를 알려면 일단 위키를 읽어보자.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83%81%EB%A5%9C 서상륜이 직접 쓴 "서선생 상륜의 경력," ,1901년 9월 9일자에 자신의 기독교 개종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이십칠년 전에 대청국 봉천성 우장당방 영구라 하는 항구의 여간 사소한 장사를 갔다가 뜻밖에 신병을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당하였나이다. 그때에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어 전..
증도의 전도사 문준경 문준경(文俊卿, 1891-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631 1891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17살 때인 1908년 3월 결혼했지만 남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에서 기독교에 가입하고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부터 신안군 지역을 순회하며 증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지역을 순회하는 도중 주민들의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했고, 여러 섬들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1943년 일제의 종교탄압이 증동리교회에도 ..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 이상규,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 코람데오닷컴 (2016. 10. 7)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86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술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앞서간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고, 둘째는 앞서간 손양원 목사를 기억하고 그 분이 남기 신앙 정신과 그 유산을 본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 두 사람을 말한다면 주기철..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장규식,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26 (2006년 겨울): 84-97. ‘분단 극복'의 지평에서 다시 읽어야 할 조만식자그마한 키에 무릎을 치는 깡똥한 검정 무명 두루마기, 말총 모자에 편리화,박박 깎은 머리에 수물수물 얽은 얼굴,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 지인들이 떠올리는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의 모습이다. 고당 조만식(1883- 1950)은 흔히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에 비견된다. 상인 집안 내지 그 카스트 출신으로 식민 본국의 심장부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한 이력이라든지, 일상에서 몸소 토산 장려의 모범을 보이며 민중의 교사로 나선 점에서, 그리고 강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비폭력 무저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간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
1919 삼일운동과 길선주 삼일운동과 길선주 33인 중의 한 명인 길선주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 약속 때문에 3월 1일 서울 태화관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고, 그날 감옥에도 가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글이 있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이다. 길 목사는 2월 20일 가정 예배를 마치고 예정된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떠났다. 그는 은혜 중에 사경회를 마치고 사리원을 거쳐 서울로 향했으나,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3월 1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길 목사는 서울역에서 관헌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고 곧 바로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 동료들이 있는 감옥 안이 영광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신학이었다. "Rev. Kil Sunju, Pastor of the Cen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