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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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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연보, 1904-10 이승만 연보, 1904-1910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 정권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신화 1 2015. 2. 28. 5:15 ⓒ옥성득 다음 글을 비롯하여 그 글에 인용된 많은 한국교회사 학자들의 논문은 이승만 대통령의 레토릭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가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고 주장하며, 여러 교회에게 준 불하 특혜와 기독교 방송 인가와 군목 제도 허용, 그리고 초대 국회와 내각의 기독교인 비율, 이 대통령 재임 기간의 기독교 교세 성장 등을 그 증거로 든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062 그러나 이 정도로 '기독교'가 국가 이념의 하나로 되었다거나 기독교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고 보기에는 허약하다. 1. 1945-1948 미 군정기와 제헌 의회: 이 때 기독교인과 선교사의 활동을 모두..
1905년 8월 이승만을 일진회 대변자로 보도한 일부 미국 신문은 오보 1905년 8월 4일 극히 일부 미국 신문이 이승만과 윤병구를 일진회 대변자로 보도한 것은 오보였다. (아래 표 첫 칸에서 보듯이 Washington Times나 Morning Post가 오보를 내보내고 두 지방 신문도 그 보도를 받아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 오보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 상황을 잘 몰라서, 혹은 일본 외교관들의 언론 공작에 의해,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나 위싱턴 디시에서 학생으로 대학 공부를 준비하던 이승만을 한국에 있는 일진회의 대변자로 본 듯하다.)다만 뉴욕 롱아일랜드 현장에서 가까운 브루클린에서 발행된 Brooklyn Daily Eagle은 황제나 정부나 정파를 대변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고 바르게 보도했다. 그 다음 날 8월 5일자 ..
이승만과 삼일운동 이승만과 삼일운동이승만이 삼일운동을 주동한 것이 아니라, 삼일운동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와이에서 전도인과 교육자로 활동, 1913-1918이승만은 1913년 2월 하와이에 정착한 후, 하와이감리회선교회(HMEC) 선교사로 일하려고 했으나, 1914년 6월 와드맨(John Wadman) 후임으로 친일 성향의 감리사 프라이(Henry Fry)가 부임하자 갈등하게 된다. 이승만은 1913년 9월 호놀룰루 한인중앙학교 교장 직을 맡아 학교를 재편 확대하고, 1915년 7월 국민회 하와이 지부의 지원으로 1916년 초에 3에이커의 땅을 사서 여학생 기숙사도 설립했다. 1915년 10월에는 한인여학원(Korean Girls’ Seminary)도 설립했다. 그러나 프라이는 이승만의 민족 교육, 곧 한국어..
1905년 8월 이승만 윤병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올린 청원서 1908년에 출판된 맥켄지의 부록에 실린 청원서이 책은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고 번역되어 있으므로 1905년 이승만과 윤병구가 루즈벨트를 만날 때 하와인 한인 대표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미국 일부 신문의 오보를 바탕으로 일진회 대표/대변인 운운하는 기사가 2011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은 1905년 8월 4일 뉴욕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때 정장을 한 이승만의 사진이다.
1905년 8월 9일 이승만이 민영환 대신에게 보낸 편지 1905년 8월 9일 이승만이 민영환에게 보낸 편지유영익, 송병기, 이명래, 오영섭 편,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29-35.이승만(1875-1965)은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5년 9개월 감옥 생활을 하고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잠시 상동청년회 교장을 한 후 민영환의 주선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여기서 고종의 밀사설이 나왔다.] 11월 29일 하와이에 도착했고, 독립 외교 활동을 구상하던 윤병구 목사를 만나 함께 워싱턴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청원하자고 합의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문 이승만은 연말에 워싱턴으로 갔다. 한국 공사관에서 김윤정 서리공사를 만나 ..
1918-19년 이승만의 국적 문제 단일 국적주의와 단일민족 순혈주의 한국사관 ⓒ옥성득 2016.8.24 1. 최근 국회의 모 모임에서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가 외국인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깎아 내렸다. 2. 몇 년 전 이승만이 1918년 미국 1차대전 군 징집을 위한 등록 카드에 자필로 '현재 국적'을 묻는 란에 ‘Japan'이라고 썼다고 질타한 글이 나왔고, 지금도 이승만을 공격할 때 애용한다. 3. 위의 두 사례는 대다수 한국인이 가진 단일민족 단일국적주의의 신화 때문에 생긴 잘못된 인식과 시각들이다. 4. 1910년 대한제국(Korea)이 사라지면서, 한국인의 법적인 국적은 일본(Japan)이 되었다. 해외에 나간 이들은 혹 미국, 혹 중국 등의 국적을 얻어 활동했다. 영어 신상 카드에 보면 인종(ethnic..
1905년 8월 이승만 미국외교활동, 2011년 한겨레신문 왜곡 후 가짜뉴스 확대 1905년 여름 이승만은 고종 밀사도 아니고 일진회 대표도 아니었다.8,000명 하와이 한인 대표로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은 태프트 국방장관의 추천서를 가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힘써 줄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개인 자격으로 전달했다. 당시 워싱턴 디시에 한국 공사관(김윤정 서리공사)이 있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두 사람의 문서를 개인 문서로 간주하고 공사관을 거쳐 공식적으로 올리라고 말했다.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이미 태프트 장관이 일본 외무상 가츠라와 밀약을 맺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1년 한겨레에서 이승만 외교를 친일로 몰았고, 2012년 정병준 교수가 논문에서 그 왜곡을 일정 수용하자, 이후 이승만의 독립 외교가 어느새 일진회 친일 활동으로 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