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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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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50년, 향후 50년의 한국교회 80년 전(1936년) 김교신은 '금후의 조선 기독교'라는 짧은 글을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교회 50년은 형편없는 인간들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이적의 역사로 그나마 흘러왔다. 50만 성도는 성령의 축복이 없이 된 이는 한 명도 없다. 과거 50년을 대표하는 인물은 대부흥의 길선주 목사였다. 그러나 이제 사이비 성령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일어나 이성을 마비시킨다. 경계할 일이다. 첫 50년이 '성신 타입'이었다면 금후엔 '학구 타입'이 되어야 하겠다. 식염수 주사를 맞듯이 부흥회로 열을 구하지 말고, 냉수를 끼얹어 차가운 머리로 학자적 양심을 배양하고 학문적 근거 위에 신앙을 재건할 때이다. 성신이든 학구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 성령의 도움으로 성신과 학구가 합금처럼 하나가 될 때 ..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조선의 희망"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부흥회로 교회에 영적 불이 붙는다고 해서 나라에 희망이 생기지 않음을 안다. 한 도시 전반이 기독교화 되어 상인까지 예수쟁이 행세를 해야 장사를 해도 희망이 약속되지 않았다. 교회 부흥으로 靈火가 타올라도 안 되고, 도시 聖市化로 기독교가 힘을 가져도, 신학생이 많고 신학교가 부흥해도, 구령 사업 선교 사업이 늘어나도 사회 변화의 희망은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양돈 양계를 해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속이지 않을 때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요, 전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대 사업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 성취나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참패하더라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
1936-37 김교신 주일마다 부활사와 성서조선사에서 설교 김교신은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기고 이후 12년간 근속 근무했다. 1930년 5월 16호부터 정상훈에 이어 주필로서 집필·교정·인쇄·우송 등 사무 일체를 전담했다. 성서조선은 158호(1942월 3월) “조와”(弔蛙) 필화 사건으로 폐간되었다. 1936년 정릉 이사 후에도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주일에는 매주 예배와 성경 강독 설교를 했다. 서울 부활사 강당에서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모여 예배를드리고 설교하다가 주일 오후 2시 30분으로 시간을 바꾸어 모였다. 이어 성서조선사에서 주일 오후에 설교했다. 1936-37년 주일 강화라는 신문사 안내란을 보면 주로 기독교 모임을 안내하고 있다. 당시 서울의 교회와 담임목사나 설교자의 면면을 알 수 있다. 김교신 강의는 인기가 있어서 늘 정보가..
1926 기인 이상재 이광수, "現代의 奇人 李商在翁, 勇氣와 信念과 希望의 人生活自軆가 偉大한 事業," 7 (1926년 11월 1일): 6-7., 李商在 翁은 현대의 기인이다. 기인이라 하면 失敬일는지 모르거니와 翁이 奇人인 까닭은 여러 가지 있다. 첫째 翁은 이미 80노인이면서 청년이라 자칭하여 중앙 기독교 청년회의 간사요, 손자, 증손자 뻘이나 되는 소년들과 너, 나하고 갸닥질을 하니 奇人이요. 둘째 翁은 가정으로는 무척 불행한 어른이어서 아들 손자의 참척을 많이 보되 일쯕 슬퍼하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오 이 놈 너도 나를 두고 먼저 가느냐.』 하고 태연자약한 것도 기인이다. 자녀를 낳은 것이 내 뜻이 아니요. 신의 뜻일찐댄 자녀를 돌우 천국으로 찾아가는 것도 오직 신의 뜻이다. 신의 뜻에 대하여는 오직 唯唯할 뿐..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하야 1960년 4월 26일 아침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 사퇴 담화 아침 일찍 비서에게 하야 성명서를 타이핑하게 했다. 마음을 정리했다. 이어 10시 경 간단한 감사의 편지 두 장을 비서에게 담담히 불러주면서 타이핑하게 한 후, 사퇴 담화 발표장에 나갔다. 4월 22일까지 그는 4.19 이후 시위의 발전에 대해 잘 보고받지 못하고 있었다. 23일부터 사태를 파악하고 24일에는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했으며, 26일 아침 탱크가 경무대를 지키고 대형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미국 대사 등이 이승만을 만나 유혈사태가 임박한 것을 알리고 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그는 사태를 파악하고 준비한 사퇴 성명서를 읽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들고 일어선 청년들을 보며 대한민국의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사실 그가 20대..
이승만의 1949년 삼일절 연설문, 임정 법통론은 그의 작품 ⓒ 옥성득 2018. 3. 22. 7:18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대 대통령 연설문은 대통령기록관 사이트 - 기록연구실 - 연설문목록"에서 볼 수 있다. http://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 연설문 목록 - 대통령기록연구실 1949년은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맞이한 첫 삼일절이요 삼일절 30주년이었으므로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김구, 이청천 등 여러 인사들이 기념사와 회고담을 신문에 발표했다. 주요 인사들의 삼일절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다음은 위 대통령기록관에 올려져 있는 이승만의 "삼일절 30주년 기념사"이다. http://www.pa.go.kr/research/contents/s..
1902년 6월 11일 Henry G. Appenzeller 여객선 침몰로 순직 1912년 그리피스 William E. Griffis가 쓴 가 출판되었다.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1858. 2. 6- 1902. 6. 11)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 1885년 7월 29일 서울에 도착했다. 1900년 두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친구들은 그의 몸무게가 거의 절반으로 줄고 야위인 것에 놀랐다. 그만큼 개척 선교사들은 문자적으로 몸을 바치는 삶을 살았다. The Death of Henry G. Appenzeller From: The Korea Review Volume 2, 1902, June issue The Wreck of the Kuma-gawa Maru. On the night of the eleventh of June there occurred on t..
블레어 목사 부부 Rev. & Mrs. Herbert Edgar Blair, 37년 한국 사역 블레어 (Herbert Edgar Blair 방혜법, 1878-1945) 목사는 방위량(William Newton Blair)의 동생으로, 1878년 9월 27일 Salina, Kansas에서 태어났다. Park College와 Princeton T. Seminary (1904)를 졸업하고 1904년 11월 20일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05년 2월 11일 선천에 파송되어 사역했다. 1908년 강계 지부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14년 대구로 이전했으며, 대구 서교회를 담임했다. 1941년 11월 한국에서 추방된 후 필리핀으로 갔으나, 일본이 점령하자 수용소에 보내졌다. 블레어는 1945년 2월 20일 Los Banos Camp에서 영양실조로 죽었다. 미군이 필리핀을 해방시키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