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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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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애국자의 비극: 장인환 어느 한 애국자의 비극 A tragedy of a Patriotic Christian Korean American장인환 (張仁煥, 1876년 3월 10일 ∼ 1930년 5월 22일) 義士평북 선천 출신 장로교인, 1904년부터 2년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30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노동자로 살았고, 미주 최초의 이민교회인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의 창립 멤버. '대동보국회'의 회원이었다.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종 양위를 주도한 스티븐스 외교 고문을 권총으로 처형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 ~1908. 3. 25)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내린 날, 의병장 이인용이 재외 한인에게 보낸 격문(The Holy War Menifesto)도..
숨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목사: 인천, 공주, 천안,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감리교 목사 안창호 (安昌鎬, 1883-1966) 도산 안창호에 가려진 공주, 천안, 하와이의 감리교회 지도자 안창호 평양 출신 장로교인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에 가려진 애국지사 안창호(安昌鎬, 1883-1966) 감리교회 목사, 감리사. 한자 이름이 다르다. 1930년대 하와이에서 김구 등 임정을 도와준 애국자이시다. 1883.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출생 1901 최병헌 목사의 딸 배세와 결혼 1903 배재학당 졸업 1904 인천 내리교회 영화학교 부부 교사 1906 공주 영명학교 교사 겸 이 해에 내한한 윌리엄(Frank Earl Cranton William 禹利岩, 1883-1962 ) 선교사 어학교사 1907 협성신학교 입학, 공주감리교회 조사 4월 공주교회 부흥회, 평양..
순천의 크레인, 총신의 크레인 John Curtis Crane (1888. 2. 25-1964. 7)1909 콜로라도대학교 졸업1913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 졸업, 목사 안수1913. 5. 20 결혼1913년 남장 선교사로 순천에 파송, 1914-16 매산학교 교장으로 봉사1916-37 목회 1920년 크레인 가족과 그의 사택, 순천 순천지부, 1919 [Nisbet, Day In Day Out (1920), p. 108.] 1921 매산학교 교장1923-40 평양신학교 강의1937 평양 신학교 거주 교수1940 전쟁 포로, 탈출 1942-48 미시시피 주에서 목회1948 재 내한, 순천에서 문서 활동하며 선교, "순천 반란 사건" 경험Clarion-Ledger, 26 Oct 1948, Tue, Page 1 1953 Systemati..
<예슈셩교젼셔 요안내복음>, 1882, 1883 로스의 첫 한글 복음서인 , 1882, 1883두 판본의 차이 1883년판부터 아래 아를 점차 없애고 (ㅎ.니 > 하니)철자법을 간단하게 하면서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수정했다.그러나 이것은 표기의 변화였지 의미의 변화는 아니었다.즉 1절에서 도는(1882)> 도난(1883)처럼 아래 아가 'ㅡ'에서 'ㅏ'로 수정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로스는 하늘 + 님의 뜻으로 이해했고 중국어 '상제'의 대응어로 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단어의 표기가 수정되었다. (예, 빗치되야> 빗치되여)이는 서울말로 수정하려던 로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한 면에 14행이던 것을 12행으로 바꾸고 활자도 크게 하고 글자 사이의 간격도 늘려 읽기에 편하게 했다. 독자의 편의/가독성를 위한 노력은 출판 2년 째에 벌써 시..
1887 윤치호 세례 위한 신앙고백서 1887년 3월 23일 윤치호(23세) 세례 때 쓴 신앙고백서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잡지 The Gospel In All Lands 1887년도 치 원본을 손에 넣었다. 6월호에 한국 특집이 나온다. 한국에 대한 소개와 한국 북감리회 선교의 초창기 역사를 간단히 소개한다. 특히 마지막 277쪽에는 정동, 아펜젤러 사택과 스크랜턴 사택의 삽화가 실려 있다. 사택 그림은 내 책 표지로 썼던 바로 그 삽화이다. 수록된 기사는 다름과 같다. 사진을 함께 올린다. "Korea," 270-271 "An American Taveler in Korea," 271-272. Edward A. Lawrence, "Missions in Korea." 273-274. T. H. Yun, "A Korean's Confession..
1894 윤치호 마애방의 결혼 윤치호와 마애방의 결혼 한국에서는 일제시대부터 '국제 결혼' 커플을 백안시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시골 총각들이 타인종 신부와 결혼하고, 해외 한인은 물론 유명인의 인종 간 결혼으로 한국도 단일민족 이념 대신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급격히 이동했다. 근대 한국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115년 전 1894년 3월의 윤치호-마애방이 첫 케이스였다. [근대 한국인(기독교인)의 첫 국제 결혼은 서재필은 1894년 6월, 윤치호는 1894년 3월.] 윤치호(1865~1945)는 1884년 말 갑신정변 후 상하이로 망명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남감리회의 중서서원에서 개종하고 1887년 첫 한국인 감리교인이 되었다. 한국에 있던 부인 강 씨는 사망했다. 미국 에모리대학과 밴드빌트대학교에서 유학을 한 윤치호는 귀국 전 청일..
1897 <독립신문>과 용어 하나님 1895-1900년 God에 해당하는 한국어 번역을 놓고 용어 논쟁이 진행 중일 때 은 하ᄂᆞ님을 지지했다. 독립신문의 지지는 한국인 일반이 하ᄂᆞ님을 선호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선교사들 대부분이 하ᄂᆞ님을 지지하도록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천주교와 성공회와 함께 "텬쥬"(천주)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평양의 마페트는 물론, 서울의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하ᄂᆞ님을 지지했다.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리되는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해방 이전의 기본 표기는 하ᄂᆞ님이었다. 1897년 1월 26일자 2-10호 1면.
1905년 8월 이승만 일진회 대변인 문제 재론 1905년 8월 이승만 일진회 대변인 문제 재론 (1) 1905년 8월 4일 이승만 윤병구를 일진회 대변인으로 보도한 Washinton Times 단신이 있다. Washington Post도 아니고, 10매의 긴 글도 아니다. 다른 설명이 없다. (사진 1) 일진회 대표라고만 했지 친일 외교라고 하지 않았다. 일진회= 친일파라는 프레임으로 글을 보아서 한겨레신문 기사가 2011년에 나왔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친일파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이역만리까지 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WT는 종종 오보를 했다.) (2) 4일자 5일자 뉴욕, 와싱턴, 시카고 등 주요 도시의 신문들은 한인 대표, 개인 자격을 말하고 어떤 정파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8일자 오하이오의 한 카운티 신문이 W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