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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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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11 25 국민회(이승만)가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독립 청원 편지 1918 11 25 국민회(이승만, 정한경, 민찬호)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파리평화회의 원칙인 민족 자결주의를 한국에도 적용하여 독립과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자고 청원하는 편지일본의 비인도적인 전제 정치를 끝내고 한국인이 원하는 자신의 정부와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피력그러나 이 편지는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 오기 전에 안창호 등이 작성한 것으로, 1905년 2월 26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워싱턴 디시에서 서명했다. 아마도 그날 이승만이 국무차관 폴크를 만났을 때 전달했을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대한민국 국호 사용, 1919년 4-6월 국호 대한민국 The Republic of Korea는 1919년 4월 11일 조직된 상하이 임정과 4월 23일 조직된 한성 임정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던 이승만은 한성 임정이 자신을 집정관(president)으로 선출하자, 먼저 총독부에 죄수들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어서 6월 14일에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영미불독에게 알렸고, 6월 18일에는 일본 국왕에게도 편지로 선포했다. 상하이 임정의 첫 내무총장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명칭 사용을 금했으나, 이승만은 외교 상 필요하다고 답했다. 결국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 그러나 내분으로 이승만은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오게 된다. 한성 대한민국 (The Repu..
길선주 목사와 삼일운동 옥성득, "길선주 목사와 삼일 운동,' , 2019. 2. 27 https://cemk.org/11868/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부정적 언급일부 민족주의자들 중에 33인 중 한 명인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1869. 3. 25-1935. 11. 26) 목사가 3월 1일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으나, 중간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어서 친일 목사가 되었다고 비판해 왔다. 다른 자료에서는 길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를 핑계로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해 왔다. 전자는 악의적 왜곡이고 후자는 사실에 대한 부분적 이해이다. 민족대표 33인 회의 장면.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독립지사로 나중에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를..
마포삼열의 강의법 방지일의 평양신학교 교수 마포삼열 강의 기억 방지일은 평양 장로회신학교(1937년 졸업)에서 은퇴한 후에도 평양에 남아서 가르치던 마포삼열(S. A. Moffett) 박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다음은 인상 깊게 남은 강의의 한 구절이다. 마 박사는 늘 "데는" 투를 늘 사용했다. "나는 믿기는 믿는데는 설명은 못 할 것인데는 여러분도 믿을 것일데는 믿지 못하면 물을 것인데는 나는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나는 그래도 믿을 것인데는 못 믿을진데 물을 것인데는 나는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반복) (학생들이 웃으면) 된 것인데는..." (출처: Moffett Korea Collection, PTS) 40년 이상 한국인을 가르치고 1901년 신학교를 설립한 후 35년 이상을 가르친 노 교수의 결론은 "나는 설명할 수..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이승만의 행동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이승만의 행동다음은 위키피디아 이승만 항목에서 3.1운동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
1919 삼일 대한독립선언을 보도한 <신한민보> 호외 1919년 3월 1일 상하이의 현순(특별대표위원)이 샌프란시스코 안창호(대한국민회 회장)에게 보낸 전보안창호는 3월 9일 이를 받았고, , 1919년 3월 13일자 호외로 보도."상항 한인 안창호: 한인 300만 명 독립단은 예수교회 3,000과 천도교회 5,000과 각 대학교와 모든 학교들과 각 단체들이 일어나 조직한 자라. 독립단은 3월 1일 하오 1시에 서울, 평양과 그 밖의 각 도시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는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씨를 파송하였소. 이승만 박사는 어디 있소. 회전하시오. 상해 특별대표원 현순" 전국에서 300만 명이 참가, 예수교회 3000개와 천도교회 5000개가 참여, 3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
언더우드는 어떤 사람이었나: 넓은 날개와 불 동가리 첫 목회 선교사 언더우드: ‘넓은 날개’와 ‘불 동가리’의 삶 내한한 첫 개신교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 ~ 1916. 10. 1.) 목사는 1859년에 태어나,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어,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32년간 봉사한 후 57세에 소천했다. 개척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40대에 백발이 되었으나, 늘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청년으로 살았다. 한국인은 행동주의자요 열정가인 언더우드를 두 가지 별명으로 불렀다. ‘넓은 날개’(wide wings)와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 ‘넓은 날개’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 그는 한 사람이 감당했다고 보기에는 엄청난 양의 다양하고 폭..
길선주 목사의 제5복음서 길선주 사경회 인기 비결의 하나: 다섯 번째 복음서길선주 목사는 사경회에서 청년들에게 성 교육을 실시하면서 이를 '제5복음서'라고 가르쳤다. 길선주 목사는 원래 입산하여 선도를 수행한 도인으로서, 선도의 주술법은 물론, 건강을 위하여 차력술인 신차력, 수차력, 약차력을 익혀 한의사로 개업했다. 선도에서 중요한 한 분야가 보정(寶精)하는 방중술(房中術)이었다. 길선주는 양기(정력)를 잘 보전하여 노년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며 부인에게도 방중술을 가르쳐 행복한 성생활을 유지했다. 동시에 자녀들에게도 가정에 내려오는 춘화도와 설명서를 통해 철저한 성교육을 실시하여 음양의 조화를 통한 행복한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길선주 목사는 성 교육 분야를 더 연구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성 교육 전문가가 되었으며 교회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