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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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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의 몰락 1960년 3월 정·부 대통령 선거 이승만은 81세, 감리교회엔 장로가 없고 장로 임기는 70세가 은퇴인데도, 장로교회 표를 얻기 위해 정동제일교회가 1월에 명예 장로직을 주었다. 그러나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조병옥(趙炳玉, 1894~1960년 2월 15일)이 사망하자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가 되었고, 문제는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할 수도 있었으므로 부대통령을 기독교인으로 뽑기 위해 부정 선거를 적극 지지했다. 상대는 천주교인 장면, 개신교 대 천주교가 대결했다. 개신교가 부정으로 이기자 환호했으나, 4.19로 천주교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1957년 3월 이기붕의 아들 강석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되다 이기붕은 선교사 서기 노릇을 하다가 미국에 유학을 가서 1923년 아이오와 주 데..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배척과 교회 분립 사건, 1925-27 옥성득, "장로교회 분쟁: 김선두, 길선주, 변인서 목사 배척 사건, 1923-1934," , 2019년 10월호 中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배척과 교회 분립 사건, 1925-27 부분 1924-25년에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지속되면서, 평양 예수교를 비판하는 「개벽」(開闢) 지의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 등장했다. 군산, 재령, 해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서 반기독교 운동과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김익두에게 권총으로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평양 교인들은 반기독교 기사를 쏟아내는 「개벽」에 대해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기독신보」는 교회개혁 논설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장대현교회는 1922년 6월에 2년간 옥고를 치른 길선주(吉善宙, 1869-1935) ..
이규갑 목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이규갑은 감리교 목사로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해방 뒤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운호(雲湖)이다. 1887년(고종 25) 11월 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李道熙)와 박안라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12년 충청남도 공주의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교장인 여선교사 샤프(Mrs. Sharp)와 이화학당 교장의 중매로 이화학당 출신의 이애라[(李愛羅), 이애일라(李愛日羅), 본명 이심숙(李心淑)]과 결혼하였다. 1921년 이애라와 사별하고, 1925년 김애라(金愛羅)와 재혼하였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아산군 영인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규갑은 1906..
1939년 5월 24일 엥겔(Gelson O. Engel) 목사 별세 1939년 5월 24일 엥겔(Gelson Engel, 王吉志, 1868-1939) 목사(부산, 호장) 별세 왕길지는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이후 1938년 은퇴할 때하기까지 38년간 부산(1900-1919)과 평양(1919-1937)에서 활동했다. 그는 고전어(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현대어(영어, 불어, 이태리어), 인도 방언(마라티어 Marathi, 힌디어 Hindi, 우르드어 Urdu)과 동아시아어(한국어, 한문, 일본어)에 능했다. 이런 언어적 능력으로 그는 구약학자요 신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성경 번역에 공헌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교회 개척과 순회 전도, 경남 지역 교회 감독과 당회를 운영했다. 그밖에 일신여학교 교장, 경상 노회와 경남 노회에서의 활동, 총회 활동을..
이종덕 목사(1884-1950) 침례교회 총회장 이종덕 목사, 1950년 순교 1950년 6.25가 터지자 교단 목사들은 이목사에게 피난을 권면했다. 그러나 이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순교자의 길을 같다. "교단장이 지켜야 할 교단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갑니까?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습니다. 죽이시고 살리시는 권세는 오직 주의 장중에 있습니다." 이종덕은 1884년 6월 15일 충남 공주군 이인면 신영리에서 한학자 이세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13년을 정진하고, 1907년 그의 나이 23세때에 부여군 칠산교회 장석천씨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나라가 강제병합을 당하자 울적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방황하던 그해 4월에 고명한 선교사를 소개받고 원산에 가서 선교사 말콤 펜윅을 만나서 친히 한국..
수피어 여고의 어머니 루트 선교사 광주 수피어여고의 어머니 플로렌스 루트 선교사 1950년대 초 곧 텍사스 오스틴으로 입양될 아이를 안고 찍었다.
소록도에서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1935년 소록도 갱생원 북부교회 맹인구락부 문신활(文信活)이 성서조선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1935년 성서조선지가 나병원에서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한센씨 환자들의 깊은 영성을 알 수 있다. 1. 3월 3월 16일(토) ...편집 조판까지 필한 후에 소록도 통신을 접하다. 이것은 주필의 일생에 가장 큰 사변의 하나이다. 이 일을 지우들께 알리기를 지체할 수 없었다. 반도의 유위한 청년들이 복음을 요구하지 않고, 유리한 전도지를 교권자 제씨가 강하게 독점하고자 할진대 우리는 애석할 것 없이 퇴각하여 소록도의 오천명 친구에게 가리라. 병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단, 지면의 제한으로 조군의 요한복음이 2면으로 단축된 것은 미안천만. 장도원 목사의 간곡한 권설도 있어서 이번 4월호는 춘풍같은 교회 친화호로..
김교신, "僞善도 그리워," 1933 僞善도 그리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증한 것, 가장 견딜 수 없이 가증한 것은 위선이었다. ... 마는 위선자의 표본으로 지목받던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들의 언행을 상고하면 저들에게는 차라리 기특한 것이 많았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않는” 것이 결점이었으나(마 23:3) 그 하는 말은 옳은 말이었으므로, 예수도 자기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명하는 말은 준행하라“고 가르치셨다(마 23:2). 저희는 헛된 맹세로써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맹세란 것이 신성한 것인 줄은 알았던 고로 지시할 물건을 고려하였다. 저희은 “잔과 소반의 거죽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토색함과 불의함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책망 받았으나, 그래도 깨끗이 할 줄은 알았고 규모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희는 선지자의 무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