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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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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선생 사진 발굴] 언론사에서 아래를 참조하여 인용 보도해도 좋습니다. 사진 출처: Moffett Korea Collection,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Library, NJ 설명: 마삼락(Samuel Hugh Moffett) 박사가 평생 수집한 후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마페트 자료 안에서 오늘 이상재 선생(중앙기독교 청년회 YMCA 총무)의 사진을 새로 발굴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진은 희미한 것 뿐이나, 이것은 사진관에서 정식으로 찍은 초상 사진 원본을 스캔한 것이다. 이 얼굴은 기존에 알려진 사진과 약간 다르다. 기존의 것은 모두 희미하거나 얼굴 부분만 오려진 것이며, 좀 더 나이가 드셨을 때 찍은 것이다. 50대에 찍은 것으로 보이고, 반신 전체가 나오는 이 사진을 이후 독립..
스크랜턴의 고베 거주지 주소 문제 [아주 사소한 문제] 1917년 11월 스크랜턴(W. B. Scranton, 1856. 5. 29 - 1922. 3. 23) 의사는 일본 고베로 이주했다. 스크랜턴에 대해서는 이덕주 교수간 쓴 대작 (2014, 879쪽)이 있다. 이 책 822-830쪽에 고베 거주지를 첫 2년 간은 우라마치(浦町) 41번지로, 1919년부터는 야마모토도리(山本通) 산죠메(三丁目) 40번지로 밝히고 있다. 후자에서 별세할 때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 1월 고베영사관에 제출한 어빈 의사의 부인이었던 Bertha K. Irwin의 여권 신청서를 보면, 신분 보증인에 스크랜턴 의사가 나오고, 그는 지난 26년 간 어빈 부인을 알아왔다고 보증을 하면서, 자신의 주소를 65 나니와마치(浪花町)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全的 기독교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 역사적 관점 内村鑑三(1861-1930년)과 김교신(1901-1945)의 나이 차이는 40세요, 김교신은 우치무라 사후에 15년을 더 살았다. 따라서 1920년대의 김교신이 내촌의 무교회주의를 계승하고 성경적인 순수 복음의 기독교를 전하려는 측면이 강했다면, 1930-45년의 김교신은 좀 더 조선적 기독교, 30년대의 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독자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20년대에는 내촌과의 연속성(continuity), 30년대는 내촌과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 것이다. 즉 1930년 이후의 김교신의 자료를 읽을 때에는, (1) 내촌이 경험하지 못했던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교회의 신사참배(1935-45), 태평양전쟁(1941..
성결교회 정운학 목사 일대기 만주 심양에서 양떼를 지키다가 숨진 선한 목자 정운학(鄭雲鶴, 1910-1966?) 목사의 일생이다. 일본 유학 중에 개종하다 정운학은 1910년 인천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인천상업전수학교에 재학 중 미술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함으로 그는 장차 화가가 되려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전수학교 졸업과 동시에 평소의 꿈대로 동양의 최고 미술학교인 동경미술학교에 지원, 거뜬히 합격했다. 당시 조선인으로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만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이 심했다. 그는 동경의 어느 일인의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동료 학생들은 그의 이름 대신에 ‘죠센징’이라고 불렀다. 죠센징은 조선인이란 일어이지만, 멸시하는 이름이었..
[요절한 내한 선교사] 루비 켄드릭, 1908년 6월 Ruby Rachel Kendrick. 내한한 지 9개월만에 질병으로 사망한 루비 켄드릭 이야기는 이제 잘 알려져 있다. 잘못 알려진 순교 사건도 바로 잡혔다. 그러나 텍사스 엡웟청년회와 그녀가 남긴 영향력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요절한 내한 선교사 1: 존슨 부부 에밀리 하트맨 존슨, 월터 버질 존슨 목사 부부, 1903년 미주리 파크대학과 뉴욕 오번신학교를 졸업한 존슨 목사 일본에서 아내를 잃고 본인도 내한 후 2개월만에 천연두로 사망하다. www.youtube.com/watch?v=mT_5nsC1Z24&t=852s&ab_channel=%EC%98%A5%EC%84%B1%EB%93%9D%EC%9D%98%ED%95%9C%EA%B5%AD%EA%B8%B0%EB%8F%85%EA%B5%90%EC%97%AD%EC%82%ACKoreanChristianity
한 선교사의 일생: 마포삼열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의 한 사람이었던 마페트(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목사 그는 스물 여섯 생일이던 1890년 1월 15일 한국에 파송되어 70세인 1934년 한국 기독교선교 50주년, 본인 한국선교 45주년 때 은퇴했다. 북한 선교를 개척하기 위해 9년이나 결혼을 미루며 작은 골방에서 잤던 그였다. 평양을 세계 최고 최대 선교지부로 만드는 일에 청년, 장년, 노년을 헌신했다. 한국을 깊이 사랑했기에 은퇴 후에도 딱히 갈 데가 없어 그대로 평양에 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1936년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잠시 방문한 것이 마지막이 길이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 선교사를 미행 감시하던] 일본 형사에 쫓기는 환영에 시달리는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돌보다 1..
이약신 목사 생애 1, 1937년 호주 방문까지 이약신 목사의 생애 1, 1898-1937 평안도 청소년 시절 이약신(1898~1957)은 1898년 4월 25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용동)에서 아버지 이병승과 어머니 박은승의 여섯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소농으로 한학과 유교에 독실하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위패를 불태웠다. 그래서 태어난 딸은 애시(愛施)로 아들은 약신(約信)으로 지었다. 곧 이약신은 모태 신앙인으로 자랐다. 그러나 약신이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누나 애시가 가산을 정리해서 서울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하고, 약신은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오산에서 남강 이승훈, 춘원 이광수를 만나 민족혼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경남 웅천읍에서 유학을 온 주기철(1897년생)을 만났다. 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