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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무오 독감 때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코로나19로 한국 교회가 바이러스에 걸렸다. 70년 동안 주일성수를 강조하다가 졸지에 주일 예배당 예배를 중지하게 되자,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예배당 사수론까지 나오고, 일부 지자체 정부에서는 예배 중지 행정명령까지 내리려고 한다. 예배학 학자나 신학교 교수나 교단에서 재빨리 지침을 내리고 성도들을 안심시키는 신학적 안내를 해야 할 터인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는 천벌을 받았다고 하면 안 되지만, 내가 아프고 고난을 받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다. 한국 교회가 왜 예배 집회를 중단하게 되었는지, 한두 달 모이지 못하는 사순절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향후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과 연구와 토론의 시간이 없다..
<한국기독교형성사>, 오타 발견 (1) 47쪽 다원주의자들에 --> 다원주의자들의 (2) 73쪽 8행: 발행 그리고 --> 발행, 그리고 (3) 199쪽, 하6: 세 기독교 --> 기독교 (4) 408쪽 헌화하며 --> 훤화하며 (5) 456쪽 지도 안에서 1번과 2번이 바뀌었습니다. (6) 그 페이지 각주 73에서 the --> The (7) 494-495: 무치내교회--> 무지내교회 (8) 사진 78: 사진 중앙에 서경조가 앉아 있고 그 오른쪽이 김종섭이다. --> 사진 중앙에 서경조가 앉아 있다. (9) 544쪽 표5에서 사진처럼 독생자를 문리본 칸으로 보낼 것 (10) 635쪽 3줄: +2로 --> ㄴ으로 (11) 660쪽 끝줄. 기도회를 것은 --> 기도회를 연 것은 (12) 757쪽 1행: 파이팅 --> 화이팅 (13) 뒷표..
[예배를 중단한 경우 2] 1938-45년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200여 개 교회는 문을 닫았다. 그 교회 교인들은 가정 예배나 개인 예배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신사참배에 찬성한 목사와 그 교회는 동방에 있는 일본 천황을 향해 90도로 절하는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일장기에 대한 90도 최경례, 기미가요 제창을 한 후에 예배를 드리는 훼절을 했다. 1941년 개교한 평양신학교 채플 시간도 1부 국가의례 후 2부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나 천주교회는 신사참배에 찬성했으므로 계속 주일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문을 닫았던 장로 교회들에도 얼마 후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목사들이 담임으로 파송되어 1부 국가의례, 2부 예배를 드렸다. 평양 장대현교회도 서문교회도 그런 식으로 일제화되었다. 그러나 신사참배..
예배를 중단한 경우 1 (1919년 3월) 한국교회사에서 처음 어쩔 수 없이 주일 예배를 중단하거나 설교 없이 기도회만으로 드린 경우가 1919년 3월 삼일운동 때 발생했다. 3월 1일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평양, 선천, 의주, 원산 등 3월 1일 만세 시위를 주도한 도시의 기독교인들은 체포되기 시작했고 경찰과 헌병대는 평양과 선천 등에서 주일 집회를 금지했다. 서울의 주일 집회도 금지되었다. 유일한 기독교 신문이었더 는 삼일 만세 운동의 상황을 보도할 수 없었다. 다만 다음 기사가 3월에 가장 먼저 나온 유일한 관련 기사였다. "금번 경성으로부터 각 지방 분요한 이 때에 형편에 의하여 다소간 강대가 당분간 빈 곳이 있음은 물론이고 집회 금지 중에 처한 곳도 있을 줄로 생각하여지오니 청컨대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
신간 소개 옥성득, (새물결플러스, 2020. 2. 27), 768쪽. 출판사 리뷰 전통적으로 한국 초기 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는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한 선교의 역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본서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영미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한국을 대상으로 삼고 선교한 선교의 역사가 아닌,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다. 나아가 교회의 발달을 기술하는 교회사를 넘어 한국 종교사와 세계 기독교사의 일부인 한국 ‘기독교’ 역사의 서술을 지향한다. 또한 본서는 근대가 가진 식민성, 다층성, 혼종성을 탐구하지만, 동시에 창출된 한국 기독교의 기독교적 보편성과 한국적 독특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본서는 저자가 35년 동안 심도 있게 연구한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결..
[마삼락 박사 설교, 2006. 5. 10] 장신대에서 부친의 유해 이장한 후 한 설교 Dr. Samuel Hugh Moffett's sermon in English "Three Rocks in the Christian Missions' (2016) 부친을 통해 본 한국교회사 요약 subtitle이 있으니 cc를 클릭한 후 들으면서 읽으면 됩니다. 내 Youtube에 8개월만에 처음 포스팅합니다. 9개월 전에 오픈하고 내 강의들과 한국 기독교인 관련 역사물 영화를 올렸는데, 400여 명이 구독하고 중단되었다. 구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B87JdcEVng&t=47s
인재>전염병>자연재해 순 지난 100여 년 간 전쟁과 혁명으로 죽은 자는 1억이 넘는다. 사망자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 720만; 러시아 대숙청 100만; 2차 세계대전 6,000만; 중국 대약진운동 3,000만; 한국전쟁 200만; 베트남전쟁 135만 등. 홍수나 지진 등 자연재해로 죽은 이들에 비해 수십 배, 수 백 배가 많다. 인류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와 최근 전쟁 때 군인 대 민간인 사망률. 전쟁을 위한 자산인 인의 사망률이 당연히 낮다. 그러니 지진이나 태풍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하늘의 뜻이라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거론하는 비성경적이고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는 재난 심판론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이웃의 재난은 우리의 회개와 도덕적 책임(사랑과 자선의 실천)을 위한 사건이다..
1918 무오 독감으로 한국에서만 14만 명 사망 무오 독감(1918)으로 14만 명 사망 부산에 상륙한 독감은 10월부터 맹위를 떨쳐 이듬해 초까지 유행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9,128명(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인구의 0.83%)이 희생되었다. (, 1920년 3월호) 충청남도에서 특히 기승을 부려 11월 말에 서산시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인 8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예산군과 홍성군에서 수천명이 사망했다. 1918년 10월말 종로 관내에서만 2만 6천 명이 감염되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경성부 독감 유행은 심하지 않았고, 268명 사망자 중 조선인은 119명이었다. 11월 9일자를 보면 평안도 각군에 환자가 넘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