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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옥성득 UCLA 석좌교수 <한반도 대부흥> 발간 옥성득 UCLA 석좌교수 ‘한반도 대부흥’ 발간 옥성득(사진) UCLA 한국기독교 석좌교수가 그동안 수집한 사진 자료, 편지, 일기, 책, 신문·잡지 기사 등을 토대로 한국 기독교의 초기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책 ‘한반도 대부흥’(홍성사 발행)을 최근 펴냈다.나귀 탄 신자·병풍으로 남여 구분한 예배당 등1900~1910년 한국교회 관련 사진 350점 수록 이만열 교수가 “한국 교회사의 매우 중요한 순간들을 실물로 포착한 사진들을 모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내용을 담았다”고 평한 이 책에는 1900~1910년 사이에 촬영된 사진 자료 350여점이 실려 눈길을 끈다.이중에는 한성감옥에 수감된 젊은 시절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일제가 주최한 가든파티 등을 찍은 것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 선교 초기 광경을..
1890 살을 떼어준 셔우드 의사와 여학생 봉업이 2: 19세기말 한국인의 몸 인식 변화와 개신교 의료 선교​전통: 신체관과 효도관이 연결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훼상치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높임이 효의 마침이다.​여기서 신체발부란 몸과 사지와 머리털과 피부인데, 피부 앞에 머리털이 나올 정도로 머리카락이 중요했다. 그래서 1895년 12월 단발령이 내렸을 때 "내 목은 잘라도 내 상투는 못자른다"며 의병이 일어났다. 영어로 표현하면 "To be, or knot to be. That's a question."이었다.​중국에서 범죄자에게는 오형(五刑)이라 하여 신체를 훼손하는 벌을 준 것도 이런 효도관과 연관된..
이승만 미화 지나치면 독이다 [지나친 역사 미화는 독이다]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이 호 목사)가 며칠 전 뉴욕 프라미스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승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를 “세기적인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했다. “1899년 1월, 추운 겨울날 조선의 중죄수만 가두는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회심한다. 조선의 양반가운데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팔도에 예수 믿는 사람은 40명, 남자 가운데는 백정, 여자 가운데는 기생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대접을 받는 양반 가운데 단 한명 이승만은 회심하고 가슴에 민족복음화의 꿈을 가진다. 예수 믿은 그날부터 이승만은 조선에 1백만 명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1) 1899년 1월 당시 조선 팔도에 개신교 신자가 40명? (2) 그것도 백정과 ..
1925 이승만 박사 李承晩博士는 渾身都是熱 金一善이러케 鐘路를 거처서 청년회관을 오면 李박사 생각이 別로 간졀해짐니다. 정말로 公번 띄고 私心업고, 혼신이 도모지 열정 떵어리인 李박사! 그야말로 愛國愛民의 열렬한 志士요 烈士임니다.일즉이 海州에서 생장하야, 자기 아버지를 쪼차 京城에 드러오기는 아마 16,7세이엿슬 듯함니다. 본래 漢文에 능한 그는 培材學堂에 드러가 영어를 중심으로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丁酉年頃에 徐載弼박사가 독립신문을 發刋할때에는 그 社에 논설기자로 드러가서, 독립이상의 고취에 盡力하얏슴니다. 독립협회라 하며, 만민공동회라 하면 더 말할 것 업시 近世의 조선에서 처음 닐어난 유일한 민간정당으로서, 당시에 宮中府中을 蕭淸하고, 민간사회를 혁신하기에 얼마마한 활약을 하엿는가하는 것은 이제 군더덕이로 말할 것 ..
Korea, the Land of Hats, 1901 1901 모자의 나라 한국챙이 큰 갓은 양반 용이고 사진처럼 패랭이 갓은 상놈 용 그래도 상투에 갓을 해야 어른이여. 갓을 쓰지 못한 놈은 다 아여, 아직 아. 삿갓, 부채, 담뱃대까지 허벌 패셔너블하네. 아직 일제 시대가 아니라 전부 다 흰 옷이 대세여.갓김치가 god김치는 아니듯이, 갓이 god은 아니여. 한국인이 god을 매일 머리에 올리고 섬긴 것은 아니랑께.
Shepping(서서평)의 짧은 전기, 1937년 Lois Hawkes Swinehart, "Elise Johanna Shepping," complied by Hallie P. Winsbrough and edited by Sarah L. V. Timmons, Glorious Living: Informal Sketches of Seven Women Missionari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U. S. (Committee on Woman's Work, PCUS, Atlana, GA, 1937), pp. 145-186. 1937년 남장로회 여자 선교사 스와윈하트가 유려한 필체로 쓴 쉐핑(서서평, 1880-1934)의 짧은 전기가 미국 남장로회의 대표적인 7명의 여자 선교사들의 생애를 소개하는 Glorious Living의 제3장..
1907년 대부흥 당시 남감리회 여자 선교사들 1907년 6월 현재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 한국선교회 소속의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명단이다. 1903년부터 전개된 원산, 송도, 서울의 남감리회 교회의 여성들의 부흥 운동을 지도한 선교사들이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평양이나 장로회나 남성의 독점적 운동이 아니었다. 여성들, 여자 선교사들의 역할, 감리회의 부흥 운동, 다른 도시와 읍의 부흥도 찾아보아야 한다.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여성해외선교회가 따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것이 결국 감리회가 1931년 여자 목사 안수를 장로회보다 먼저 하도록 이끌었다. 조직에서 지도력이 나온 경우이다. 모두 11명 가운데 두 명의 소속이 없는 것은 Sadie Harbough의 간호사의 경우 세브란스병원의 의사 허스트와 결혼을 하고 북장로회로 소속을 옮겼고, 부흥..
1919 삼일운동 수감자를 돕는 혈성단 애국부인회 [이 한 장의 사진]매일 수감자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애국부인회 회원들,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