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1920s

(29)
“독립선언서에 들었던 교회유력자 만기 출옥, <기독신보>, 1921년 11월 9일 지난 4일에 출옥된 17인 중 8명은 교회 내 목사 전도사들 실로 하루가 천년 같은 철장 생활을 만 3년간이나 계속하던 독립운동의 수령 47인 중에 지난 11월 4일로 형기를 마치고 새 세상을 구경하게 된 이는 17인인데, 그 중에 8명은 예수교회 내에 유력한 목사와 전도사들이었다. 당일 그들이 복역하던 경성감옥 문 앞에는 그들의 가족들과 남녀 교우들이 이른 아침부터 답지하여 수 천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그 중에는 경성 내에 최병헌(崔炳憲) 감리사와 이상재(李商在) 씨와 인천 감리사 김찬흥(金燦興) 씨와 수원지방 감리사 현석칠 씨까지 옛 친구의 얼굴을 맞고저 감옥문 밖에서 떨고 기다렸는데, 그들이 나오기를 시작하던 때에는 반가운 얼굴을 대하고 따뜻한 손을 붙잡고자 실로 잡답한 중에, 부인네들..
1923 이상재 선생이 게일 목사 화갑 때 보낸 축사 이것은 1923년 2월 19일 서울 연동교회 목사 게일(James S Gale 奇一, 1863. 2. 19-1937. 1. 31) 선교사가 회갑을 맞이했을 때, YMCA 총무로 있던 이상재 선생이 보낸 축사이다. 이상재는 게일을 기일 선생, 기일 목사로 호칭했다. 이 축사는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기에 내가 그 한자를 읽고 아래와 같이 번역해 보았다. 더 좋은 번역은 다음에 올리겠다. 祝賀 축하 奇一 先生 花甲 게일 선생 화갑 使迷路者 返正 미혹자로 하여금 돌이켜 바르게 하고 處暗者 被先必導之 흑암에 있는 자는 먼저 반드시 인도하여야 其人然後迺可 그 사람은 연후에 가능하도다. 其人伊誰 非我奇牧師耶 그가 누가인가? 우리 기일목사가 아니겠는가! 流水蕩蕩 維羊之飮 흐르는 물은 넘쳐서 양이 마시고 芳草茸茸 維羊之糧..
1921 전주 남자성경학교 남자성경학교, 여자성경학교가 자리를 잡아가던 때의 모습이다. 한해에 30일간, 이어서 두 달 간, 이어서 6개월 수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신도 지도자 훈련이었다. 1920년대는 한국에서 '민중'을 발견하는 시대였다. 교회에서는 평신도 훈련과 사역이 증가했다.
호떡 기자, 1923 1923년 2월 에 실린 "평양 만필" 후반부이다. 지방지방에 나가보면 소위 호떡 신문기자라는 것이 흔하다. 그것은, 무슨무슨 신문지국의 기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단니면서, 호떡 굽는 데로나, 다니면서, 사건탐방한다는 의미이다. 작년 11월 경의 일이다. 平壤의 박모라는 청년이, 일시 유혹에 빠저서, 명예상 불이익하게된 어떤 사실을 원고지에 젹어가지고 當者인 박모에게 가서, 돈 50원을 주면, 암암리에 무더 바리겟다고 한 신문기자 박모가 잇섯다. 그 때에 박모는<76> 50원을 거절하엿다는대 수일 후에, OO일보 제 3면에, 「美人計詐欺賭博」이라는 題下에 사실의 몃 배를 늘여서 게재된 일이 잇섯다고 한다. OO일보 平南支局의 기자라는 간판을 내여노코, 「그대의 사실을 내이는 것이 조흐냐, 안내이는 것이 ..
1924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박복영 선생 아래 박창수 박사의 글에서 앞 부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1924년 암태도 소작 쟁의를 실제적으로 이끌었던 박복영에 대한 글이다. 일부 사실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지만 1924년 8월 30일, 지주 문재철과 담판을 하여 소작인들에게 유리한 여러 조항을 받아낸 인물이다. 박창수, "박복영 선생과 문준경 전도사- 사회적 책임과 전도가 용서와 만날 때," , 2012. 1. 17. http://www.jabbey.org/bbs/bbs/board.php?bo_table=common&wr_id=2904&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72 박복영(朴福永, 1890-1973)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암태도에서 태어났..
100년 전 북간도, 눈물의 성탄절 [백 년 전의 성탄절] 1920년 북간도의 크리스마스 10월 9일에서 11월 5일 발생한 경신참변 때 간도에서 4,500명의 한인이 일본군 75연대에 의해 무차별 학살되었다. 이 부대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항일 독립군에게 잇따라 대패하자 추격전을 벌이며 만주 일대 한인들을 보복 학살했다. ("봉오동 청산리대첩 관련 희귀 사진발굴," , 2010년 8월 27일자 www.hani.co.kr/arti/PRINT/437087.html) 이 사진은 러시아군이 처형한 마적단 두목의 사진이지만, 경신참변 때에도 이런 식으로 사살하고 들판에 버렸거나 집단으로 매장했을 것이다. 경신참변은 사실 192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학살의 와중에서 100년 전 용정교회는 성탄절을 맞았다. 자료 부족으로 그 때 성탄절을 재현..
거제 하청교회 초기 역사 100주년이 되는 나의 모 교회, 거제도 하청교회의 초기 역사, 1920-24; , 1924년 10월 8일자 내가 말로만 들었던 고향 교회의 초기 역사를 이렇게 원자료로 보게 된다. 설립자는 신영식(辛令植) 영수. 1920년 경 자택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1922년 4월에 하청리 중앙에 예배당을 세우고 가족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1924년 하청리 유계리에 외부에서 온 신자인 강재풍 씨가 신학강습회를 열고, 교사 김재석 씨가 함께 하면서 신자가 늘 때, 권탁호(權卓鎬) 씨는 입교하는 날 유계리에 있는 초가 3간을 예배당으로 기부했다. 1926년 5월부터 유계리 예배당 시대가 열렸는데, 장년주일학교와 유년주일학교와 유치원까지 조직하게 되었다. 어릴 때 하청리 중앙에서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걸어갈 때..
許時模(Haysmer) 의사 사건을 재론한다 1926년 6월 28일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안식교 순안병원 의사 허시모(C. A. Haysmer 許時模)가 1925년 9월 15일(음력 7월 25일)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훔친 한 소년에게 사사로이 벌(私刑)로써 두 뺨에 '독약'(염산)으로 '도적'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소년 김명섭이 울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항의했으나, 의사는 오히려 도적질을 고치려면 그런 벌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썼다. 전국으로 반미 감정이 퍼지고, 도처에 규탄 대회까지 열렸다. 사회주의자들이 이 사건을 반기독교 운동에 이용했다. 일본과 미국 신문에도 보도되어 선교사를 비판하고 미국인의 인종주의를 규탄했다. 결국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