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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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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정 대한민국 적십자회의 활동 1919년 삼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만행과 사상자 보고는 그 해 미국 신문에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적십자사 일본지부가 공정하게 보고했다면, 사상자나 피해 가옥 등이 제대로 알려졌을 것이다. 미국 적십자사가 한국인을 도우려고 했을 때 일본 정부는 거절했다. 그러나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대한민국 적십자회가 조직되자, 아래 신문 기사처럼 1920년 10-11월에 발생한 간도 대학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피해 상황을 보도했다. AP를 이를 인용하면서 전 세계에 한인의 피해와 일본의 만행을 알릴 수 있었다. 북간도 등에서 한 달 동안 25개 교회가 불탄 사실에서 보듯이, 간도의 한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했고, 일제는 철저히 교회를 불태우며 보복했다. 임정은..
1921 게일의 변화, 이상재의 기개 사람은 변한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연동교회의 게일(James S. Gale) 목사를 대표적인 친일 선교사로 보는 것이 통설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이상재 YMCA 총무가 삼일운동 이후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인 1921년, 친구 게일은 이상재를 진정한 애국자로 칭송하면서 쓴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 No!를 분명히 하고, 웃으면서 게일과 작별하고 당당히 감옥으로 갔다. "수많은 용감한 지사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겪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나와 같은 늙은 개가 어찌 [길에서] 놀면서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갈 때 이상재의 나이가 70세였다! 이상재는 1905년 55세에 회심하고 사람이 변했다. 이후 나라와 교회와 청년을 위해 헌신했다. Gal..
1928 여자청년회 빙수점 三山人, “諷剌諧謔, 新流行豫想記: 女子靑年會 氷水店,” 제11호 (1928년 2월); 99-100. 금년에 무엇이 새로 유행할 듯 십으냐? 나 가튼 둔한 인물에게 그런 것을 뭇는 것은 아모리 해도 실책이다. 그러나 실책은 그의 실책이지 내 잘못이 안이니 인심 좃케 생색이나 내고 딴청이라도 하나 해 본다. 독자께는 미안하지만. 4월이 되면 야시장이 버러지고 물건 살 사람, 안 살 사람이 쏘다저 나온다. 그런대 夜市에 나오는 사람이 반듯이 물건 살 필요로만 나오는 것이 안이니 야시에서 물건을 좀 더 잘 팔 욕심이 잇는 사람은 무얼로던지 다른 데에 업는 야시의 명물을 지어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로 보아서 야시의 명물은 「싸구료」 소리와 뿌럭지 업는 花草장사 뿐이라 할 것이다. 만일 더 잇다면 수박장사와 깡깡..
과거엔 굳이 베니스에 갈 필요가 없었다 한강은 다스리기 쉽지 않았다. 서울은 거의 매년 홍수에 시달렸다. 1925년 7월 18일. 이 날은 을축년 대홍수의 날이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송파근린공원 입구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서울의 곳곳은 여름 장마철에 침수되기 일수라, 베니스의 도시가 되었다. 다음은 1922년 종로 2가 YMCA 건물을 받아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중앙감리교회 사진이다. 아예 침수를 예상하고 예배실을 올려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홍수는 계속되었다. 이후 이런 일은 다시 없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으로 강 치수와 하수도 정비는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이상재, 연설 "조선 청년에게" (1927) 李商在, “演說: 朝鮮靑年에게” (上) 원반: 제비 表朝鮮 레코드(Nitto) B143-A, 1927년 녹음 *국립국악원 제작, 한국고음반연구회 기획 이 음반은 1927년 일본 일동(닛토) 축음기회사의 한국 레이블이었던 제비표 조선레코드에서 당시 YMCA 총재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육성 음반을 취입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RXX7frivlQ&list=PLurmbV5BLY2Kiud5XqTKTlbjfjPi7YnAe&index=7 --------- 내가 조선 청년에 대하여서 세 가지로 관념을 보는데, 첫째는 조선 청년에게 아주 극단으로 희망을 허는 게 있고, 둘째로는 조선 청년에게 시방 현상을 보고서 극단으로 비관하는 일이 있고, 필경 셋째로..
1926 북간도 용정 동명교회 김익두 사경회 "동명교회 부흥," , 1926년 4월 14일자동명교회 부흥회 기념 촬영(間島) 북간도 동명교회에서는 3월 4일부터 10일까지 부흥회를 개최하고 룡정교회에서 승리를 얻고 돌아오는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였는데매일 6-700명씩 모여 격렬한 강연을 들은 결과 신 신자와 재신자가 많이 있는 중, 금주 단연까지 한 자도 있으며또 예배당 증축하기 위하여 550여 원을 연보하였고믿음으로 병을 고친 자도 많이 있다고 한다. ---------------북간도 용정 동명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부흥회도 다른 교회와 다르지 않았다. 새 신자, 재신자가 나오고 교회 증축을 위한 헌금, 금주 단연, 치병 등의 일이 있었다. 위의 사진이 흔히 알려진 명동촌 명동교회 모습이다. 오늘 그 사진을 찍은 날을 알았다. 1926년 3월 [아..
1929 이용도, 거룩한 바보 시므온 이용도 목사, "성자 이야기: St. Simeon the Holy Fool" 이용도 목사의 호는 是無言이다. '거룩한 바보 성 시메온'을 소개하고 그처럼 어리석고, 미치고, 바보처럼,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며 예수처럼 살고 전도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높아지려는 시대, 많이 가지려는 시대, 똑똑한 시대, 교권을 차지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는 울면서 침묵하면서 거룩한 바보의 삶을 살았다. 아, 이용도 목사!. 천막에서 설교하는 이용도 목사 李龍道, “聖者 얘기,” , 1929년 10월 16일, 23일 나는 지금 여러분과 얘기를 하자고 나 안젓슴니다. 내 얘기를 듣는 여러분은 열너댓 살로부터 열 팔구 세과 즉 스무살 이내의 분들인 줄 알겟슴니다. 고린도전서 三章 十八절엔가 보면 “지..
1929 교회의 사활 문제 양주삼, “교회 死活問題,” 「기독신보」 (1929년 11월 27일; 12월 4일; 12월 11일)개신교인 1916년 → 1927년에 20만 명 줄어 -7.5% 인구교인수191013,128,780(200,000)1916(14,600,000)279,586192718,661,494259,076 ()안은 추정치 1916년 교인 279,586명이 1927년 259,076명으로 줄어 -7.5% 성장을 보였다. 인구가 약 400만 명 증가할 때, 개신교인은 약 20만 명이 줄었다. 전체 인구에서 교인의 비율은 10년 만에 1.9%에서 1.4%로 감소했다.시대의 변화, 사조의 변화, 청년 세대의 변화 등으로 교회가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의무 잃은 교인"(한 때 교회를 나왔으나 이제는 잘 안 나오는 가나안 교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