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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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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선천 "인구 6,000명의 마을인 선천의 지역 교회 사역은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른바 북교회와 남교회, 두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한번은 방문자 한 분이 두 교회가 서로 아주 가까운 것을 보고는 무엇 때문에 갈라졌는지 물었습니다! 그저 모교회가 너무 많이 커졌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북교회 [양전백] 목사는 한국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으로, 1919년 3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감옥에 있었습니다. 남교회 목사는 지금 정치범으로 복역 중입니다만, 교회가 그 자리를 임시로 맡은 목사뿐 아니라 그의 가족도 부양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에는 부목사 한 명씩이 있는데, 둘 다 신학교 학생입니다. 북교회의 등록 교인은 2,000명이 넘고 남교회는1,600명 정도 됩니다. 북교회에는 장로 1..
1920 러시아 연해주 부인독립회 적십자단 간호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기독교인 부인들이 창립한 대한부인회는 1919년 삼일운동을 계기로 그 이름을 부인독립회로 바꾸었다. 1919년 말 회장은 이동휘의 차녀 이의순이었고, 간도 지역 애국지사 채성하의 딸 채계복과 이혜슨, 우봉운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채게복은 정신여학교에 유학했고, 서울에서 3월 5일 시위에 참여한 후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부인독립회는 1920년 봄 구호를 위한 간호부양성반을 조직하고 한인 여성 50명이 단기 속성반에 입학했다. 채계복은 대한적십자가 간호부로서 12명을 모집하여 입학시켰다. 다음 엽서를 보면 태극기와 적십자기를 배경으로 9명의 여성이 간호복을 입고 있는데, 제1기 졸업생으로 보인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봉사하던 미국 적십자사의 지원으로..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무덤, 1924년 김구 선생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오른쪽이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왼쪽)과 함께 아내 최준례 여사 무덤을 찾았다.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백범기념관 제공). [출처 1]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내용을 풀이하려면 자음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이해하면 된다. 즉, 'ㄹ'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면 ㄱ-ㄴ-ㄷ에 이어 네 번째이니 '4'를 말한다. 최 여사의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 즉 1924년 1월 1일이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1919년 건국되었으므로 그런 연호를 사용했다. 다음은 블로그 “보림재”에서 퍼온 글이다. (출처 2) 하루는 신천 사평동(謝平..
동성연애 첫 기사, 1921 신문 지상에는 일본인 여성들의 동성 연애 사건이 1921년부터 꾸준히 보도되었다. 1921년 일본어 신문인 『朝鮮時報』는 청주자혜병원 간호부 야카미 도키코(矢上, 22세)와 야브이 키쿠코(藪井, 23세)의 동성연애를 보도했는데, 필자가 아는 한 국내 발행 신문에서 동성연애 사건을 보도한 첫 사례였다. 낯선 외국 땅에서 한 병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자매처럼 지내다가 1921년 봄부터 밀회를 하다가 정사(情死)를 시도했고 해고되었다. 동성연애는 일본인들 가운데 시작되었는데, 한국인에 관한 기사는 1925년 이후에 주로 등장하며, 동성애로 인한 자살 기사는 1931년부터 나온다.
안창호의 손글씨 엽서, 1925 (1) 들째아들 필선安必鮮에게 보낸 엽서, 1925. 4. 15 나는 덴버까지 왔고, 오늘은 시카고로 가겠다. 내가 심은 버드나무에 물을 좀 주어라. 네 아부지, 4월 15일. (2) 딸 수라에게 보낸 안창호의 엽서, 1925. 5. 23 내 딸 수라, 너는 잘 있느냐? 나는 평안하다. 내가 너를 보고 싶다. 내달에 집에 가겠다. 5월 23일, 네 아부지. 안창호는 삼일운동으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1919년 상하이로 떠났다. 1924년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북경에 ‘동포에게 고하는 글’ 작성하여 보냈다. 1925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왔는데, 이 엽서들은 미국에서 여러 도시를 돌면서 집에 가기 전에 자녀들을 그리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썼다.
삼일운동 후 한국교회 방향 제언 “각 전도단에게 일언을 고함,” , 1920년 7월 8-9일. 심양초부(沁陽樵夫) 객년 소요(騷擾) 이후로 우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선 종교는 흡사(恰似)히 대악풍 폭우를 겪은 수림과 같아서, 혹은 회당문을 견쇄(堅鎖)하여 1개 텅 빈 건축물만 회춘을 고대하고, 엄립(儼立)한 자도 불소하고, 혹은 지도자를 잃어서 난마(亂麻)같이 얼크러진 교회도 있으며, 혹은 왈 불가형언의 참화를 입은 교회도 많은 것은 언필(言筆)을 의지하지 않아도 과거의 사실이 증언하는 바라. 그러나 교회가 □□□□□기 인류에 여하 정□□ 이익을 여□함인지는 □□ 하하한 필요가 무하거니와, 특히 조조에 재하여는 엄한 연후에 송백의 절(節)을 지한다 함과 같이 과거를 소고하고 현재를 관찰하며 미래를 추구하여 혹은 □□ 혹은 무형으로 막대..
1921년 6월 압록강 대안 지역 종교 통계 안동현, 집안현 등 압록강 건너 만주 지역 종교: 예수교인이 조직 훈련된 반면, 대종교와 천도교 계열 신종교는 포교소와 목회자 부족으로 비조직, 교인수도 신빙성이 없다. (당시 대안 지역 한인 인구는 6만 6천 여 명으로 인구의 약 10%가 종교인) “대안 종교별 신도수 (對岸 宗敎別 信徒數),” 『朝鮮日報』, 1921년 12월 2일. 금년 유월 조사한바 압록강(鴨綠江) 안(岸)에 이(移)한 조선인의 종교 급 종교유사단체(宗敎及 宗敎類似團體)를 계(界)한즉, 안동현(安東縣)에 예수교회당 3, 신도 753명 관전현(寬甸縣)에 예수교회당 3, 신도 65명 대도교(大道敎)에 교구실 3, 신도 165명 집안현(輯安縣)이 예수교회당 6, 신도 516명 대도교(大道敎) 교구실 7, 신도 1,597명 시천교(侍天敎)..
두레: 놀이하는 인간과 노동하는 인간의 조화 옥성득, "두레먹이와 두레난다," 85호 (2022년 11-12월): 12-15. 처용은 밤드리 놀았다. 두레꾼은 두레먹이로 놀았다. 잘 노는 사람, 잘 노는 문화, 안전하게 노는 문화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