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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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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한성서공회사 III> “『대한성서공회사 III』: 한 기관의 역사를 넘어 축약본 한국교회사의 역할까지 해온 책” [옥성득, 대한성서공회사Ⅲ 1945~2002,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0] “『대한성서공회사 III』: 한 기관의 역사를 넘어 축약본 한국교회사의 역할까지 해온 책” [옥� 논문, 학술저널 검색 플랫폼 서비스 www.dbpia.co.kr file:///C:/Users/Oak/Downloads/%E3%80%8E%EB%8C%80%ED%95%9C%EC%84%B1%EC%84%9C%EA%B3%B5%ED%9A%8C%EC%82%AC%20III%E3%80%8F%20%ED%95%9C%20%EA%B8%B0%EA%B4%80%EC%9D%98%20%EC%97%AD%EC%82%AC%EB%A5%BC%20%EB%84%98%EC%96%B4%..
언더우드자료집 1-5권 104년 전 오늘 Horace G. Underwood died on Oct. 12, 1916. 20년 전 나는 그의 자료집을 만들기 시작해서 10년 만에 다섯 권을 완성했다. 2020년 올해 미국에서는 그 자료집들이 디지털화되어 미국 학생이나 교수는 읽을 수 있다. 언더우드 가신지 100 여 년만에 그의 글이 온라인에 올랐다.
한국교회사에서 개교회 창립일 기준이 있는가? 한국교회사에서 개교회 창립일 기준 문제 이것은 앞으로 논문으로 써야 할 주제이고 교회사학회가 토론해서 일정 기준을 정해야 할 사안이지만, 내가 여러 차례 이 문제를 거론했으므로, 일단 다음과 같이 내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현재 한국기독교사연구소나 학회, 혹은 교단이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지 않으므로, 각 교단이나 개 교회가 그동안 고무줄처럼 자신들의 창립일을 바꾸거나 앞당겨 왔다. 어떤 도시에서 자신들의 교회가 최초의 교회라는 경쟁 의식이 앞서서 과거 오랫동안 지켜오던 창립일을 수정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사 학회나 교단 차원에서 교회 창립일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서 교회사 서술에 일관성을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 해방 이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대다수였으므로 일단 두 교회의 기..
John Knox가 묻힌 자리, 서 있는 자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아버지 John Knox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했다. 그는 St Giles' Cemetery (NT27SE 6)에 묻혔다. 그러나 Laing (1864)에 의하면 그의 무덤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현재 Charles II in Parliament Close의 서쪽, 주차장의 23번 지점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의 무덤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에든버러대학교 신학대학원 구내에 이런 동상을 세웠고, 사람들은 녹스를 이곳에서 만나고 있다. 8년 전 내가 에든버러신학교에 간 날은 날씨가 흐렸다. 동상도 주변 대리석도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다. 개혁자가 잊혀진 모습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다른 사진으로 위에 올린다. 한국에도..
서울에서는 1919년 2월 중순에 무오독감 종식 "流行性 毒感, 경성에는 없는 모양, 동경서는 창궐 중," , 1919년 2월 13일. 1919년 2월 도쿄에서는 스페인독감 2차 유행이 왔으나, 서울에서는 10-11월에 대유행을 한 후 2월 초가 되면서 유행이 거의 끝났다. 일부 발생환자가 있었지만 급속히 환자는 줄었다. 일부에서 삼일 운동 지도자들이 무오독감(스페인 플루)에도 불구하고 3월 1일 서울과 평양 집회 등을 계획했다고 하면서, 정치 운동은 팬데믹 와중에서도 유행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회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2월 중순 이후 서울에서 발병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독감 유행에 대해서 상세히 보도하던 를 보면 2월 중순 이후 한국의 도시에서 발생한 사례를 보도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소수 발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
그때나 지금이나, 기도로 치병한다고 돈을 갈취 "祈禱로 毒感을 고친다고 돈을 먹은 중놈," , 1918년 11월 22일 황해도 연백의 강서사 승려 홍순익은 불전 공양을 잘 하면 유행성 감기는 물론 만병이 통치된다 사기를 치고 돈을 갈취했다. 기도로 독감을 고친다는 헛소리로 돈을 먹었다.
1918년 10월 한 달 서울 종로 유행성독감 피해는? 1918년 10월 종로경찰서 조사에 따르면 한 달 동안 스페인독감 환자 확진자는 2만 6천 명이 넘었다. 당시 위생은 경찰 업무였다. 일본인 2,600명, 한국인 2,4000명, 계 26,600 여 명 ("종로관내만 2만 6천: 기막히게 많은 독감의 환자수," , 1918년 10월 31일) 사망자는 일본인 10명, 한국인 138명으로 대부분 어린이나 노인이 죽었다. 일본인의 치사율은 0.38%, 한국인은 0.58%로 일본인이 좀 더 치료를 잘 받아 치사율이 낮았다. ("朝鮮人에 死亡者가 많은 이유는 치료를 잘 못하는 까닭이다," , 1918년 11월 3일) 10-11월에 일본, 중국, 한국에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다. 서울 감염자를 조사해 보니 하류층과 노인층이 많았다. ("京城에 毒感으로 死亡한 사람을 ..
1918 미주 한인 스페인독감 피해 1918년 10월 24일 를 보면, 스페인 독감을 '스패니쉬 인풀루엔자'나 '서반아 감기'로 지칭했고, 마스크는 '낯가리움'으로 번역해서 사용했다. 지금도 '낯가리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이오밍 수퍼리오 푸에불로에 거주하던 원창의 씨가 스페인 독감으로 10월 16일에 사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인쇄부 사무직의 최응선 씨도 감염되었으나 완쾌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10월 22일 하루 사이에 1.242명이 감염되었고 44명이 사망했다. (전체 감염자 7,486명, 사망자 206명) 이에 시 당국은 학교를 폐쇄하고 연극장이나 무도장과 같은 공중 장소에서의 집회를 금지하고 거리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독감은 활동적인 젊은 층이 많이 걸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만 동거하는 부부의 경우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