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245) 썸네일형 리스트형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 병원, 간호학교 카탈로그 표지, 1932-33 학교 요람 표지치고는 독특하다. 1932-33년 세브란스병원, 연합의학전문학교, 간호학교 표지를 보면 세브란스의 역사인식을 볼 수 있다. 곧 운영 주체 입장에서 정리하면, 1885-1904에 왕립 정부 병원(제중원)에서 임시적인 의학교가 1886-1890년에 운영되었으며, 1904년에 북장로회의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질 때 의학교가 설립되어 1912년까지 운영되다가 1912년 한국 내 여러 선교회들의 연합으로 연합의학교가 되었다. 일본 총독부와의 관계에서 보면 1917년 5월 14일 학교 재단법인으로 인정되었고, 1923년 2월 23일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32 진주교회 새 예배당 완공 윤인구 목사가 그린 진주교회 St. Paul's Church, 1932년 10월 완공 한국교회에 유행하게 되는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이때부터 교회당 앞에 높은 십자가 탑을 세우고 큰 문으로 들어와 남녀석 두 개 출입구로 갈라져 장방형 예배실로 들어가는 양식이 유행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일제 말기로 가면서 한국교회는 열악한 상황에서 좀 더 수직성을 강조하고 종말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1930 마산 의신여학교 마산의 첫 근대학교는 1908년에 세워진 창신학교이다. 일제 시대에 의신여학교로 운영되다가, 해방 이후 다시 창신학교로, 창신고등학교로 발전했다. 의신여학교 발전에는 호주선교부의 맥피(Ida McPhee, 1881-1937) 양이 크게 기여했다. 1. 민족대백과사전을 보자 1906년(광무 10) 5월 17일에 기독교 장로인 이승규가 현 마산 문창교회 자리에서 독서숙(讀書塾)을 설치하였고, 2년 후인 1908년(융희 2)에서야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마산시 상남동에 사립 창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경남 일대에 호주(濠洲)에서 온 선교사들은 창신학교를 육성하는 데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하여 고등과를 병설하였다. 이것이 창신중학교와 창신고등학교가 설립하게 된 기반이 되었다. 교육목적은 교육을 통하여 국.. 1929 삼천포장로교회 신축 1929년 3월 28일 삼천포장로교회 신축 예배당 함석 지붕, 난로를 설치했다. 종탑이 높다. 넓은 입구를 두개 만들어 남녀 출입을 쉽게 했다. 초가집 시절은 대개 박해와 핍박의 시대였다. 그 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삶으로 모범을 보인 교회가 드디어 함석지붕 예배당을 짓고 목사들을 초청하고 교회 헌당 예배를 드리는 감격을 맛볼 때 찍은 사진이다.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인정을 받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90년 후 지금 예배당과 교회의 모습은 또 얼마나 낯선가?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책이라면 읽어주시오, 1929 최근 어떤 잡지에 프랑스 전쟁에서 발생된 사실이 기재되었는데, 그 사실이야말로 간호 사업으로서 기독교 사업을 하는 기회에 대한 모범적 예와 같이 생각된다. 그 전장에서 어떤 육해군 목사가 부상을 당하여 지면에 드러누운 부상병을 보고, “성경인 이 책으로부터 무엇을 좀 읽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그 때에 부상병은 “내가 심히 목이 마르니 성경보다도 물을 좀 갖다 줄 수 없느냐?”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할 수 있는대로 물을 얻어다가 주었다. 그런즉 부상병은 “내 머리 밑에 무엇을 좀 베어줄 수 없느냐?”고 또 다시 청하였다. 그 목사는 자기가 입었던 외투를 벗어서 그것을 뭉쳐서 베개로 삼아 그 부상병 머리 밑에 가만히 베어주었다. 그 부상병은 또 다시 “내가 심히 추우니 내 몸 위에 무엇을 좀.. 1912 부활절 서울 감리교회 연합예배 1912년 배재학교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 광경이다. 5000명이 모였다. 설교자는 서울을 방문 중이던 Bashford 감독. 1935 포항교회 30주년 [그리운옛날] 포항교회 30주년, 1935 1905년 아담스(James Edward Adams 안의와, 1867-1929) 목사가 설립 1934년 새 교회당(기외지붕)을 마련하고 정인과 목사 초청, 기념식을 가졌다. 교회 설교단 좌우에 성경구절을 달았다. 오른쪽에는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한 4:24) 왼쪽에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온 땅은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박국 2:20)이다. 회중은 마루에 의자 없이 그대로 앉았다. 남녀석 구분은 있으나(왼쪽이 여자석) 중간에 막지 않고 함께 앉았다. 현재 포항제일교회(박영호 목사 시무)이다. 경북 영천읍교회, 초가 삼간(1905)에서 기와 신식 건물(1921)로 경북 영천제일교회, 초가삼간(1905, $6)에서 기와 목조/벽돌 건물(1921, $3,750)로: 한국 초기 교회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두 사진 1900년 초에 세워진 시골 교회는 초가 삼간에서 출발했다. 20년이 지나면 4000달러 상당의 연보를 모아 번듯한 신식 예배당을 지었다. 다음 사례는 경북 영천읍교회이다. 영천읍교회는 1904년 4월 10일 아담스(James Edward Adams 안의와, 1894년에 내한, 1897년 5월에 부산에서 대구로 전임) 선교사의 인도로 화룡동 배선달의 사랑방에서 박수근을 위시한 2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905년부터 청통면 우천동에 초가삼간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1906년에는 교인이 40여 명으로 늘어나 예배 처소가 협..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