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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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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사진 오류: 서울 연동장로교회를 평양의 장로교회로 잘못 설명 2018년 11월 23일자 "[사진으로 보는 역사 이야기] 종교, 조선의 역사와 함께하다 (4)" 하반부를 보면 다음 사진과 함께 잘못된 설명이 나온다. 1. 이 사진은 서울 연동장로교회, 1907년 경 사진이다. 지금 종로5가 연지동 주변이다. 함석지붕에 서양식 장방형 목재 구조로 지었다. 원산 감리교회와 유사한 모습이다. 2. 평양 신학교는 교회와 붙어 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서문회교회와도 몇 분 거리에 있었다. 서울에는 물론 신학생 양성소가 없었다. 당시 신학생 양성소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서울 보구여관에 간호원양성소는 있었다.
한국인의 첫 성탄, 1882 한국 개신교인이 읽은 첫 성탄 이야기 --로스역본 1882년과 1887년 누가복음 2장이다. 번역을 읽고 비교해 보자. 1882년 2장을 읽어 보면---------- 요셥은 다빗의 족보라 고로 가니내의 나살앨 고을노 좃차 유대 다빗의 고을에 올나가니 벳니염이라 그 빙문한 배체 마리암 이무 잉태한 자로 함게 호젹을 올니더니 마즘 거긔셔 아희 나을 기약이 차이여 맛아들을 나아 배로써 싸고 말궁이여 누이문 객점에 용납할 곳이 업스미라 그때에 양치는 자 들에 거하여 밤에 그 무리를 지키넌데 쥬의 사쟈 강님하여 쥬의 영화로운 빗치 둘우 빗치우거늘 크게 무셔워 하니 사쟈 갈으되 무셔워말라 내 너의게 대희할 복음으로써 뎐하노니 이는 뭇 백셩을 위할 것이라 오늘 다빗의 고을에 너의를 위하여 구쥬를 강생하니 곳 키리스토..
한국에 처음 설치된 일본 적십자사 병원, 제물포, 1894년 러일전쟁 기간에 한국에 설치된 일본 적십자가 병원 사진은 흔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 때 이미 일본군은 적십자사병원을 제물포와 부산에 설립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개항장의 방역 위생권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자체 검역을 실시했다. 조선 정부는 아직 검역 인력이나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1894년 7월 10일 외부대신 김윤식이 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에게 의주 지역 검역 실시를 부탁했다. 개항장의 검역과 격리가 한 국가의 주권을 상징한다면, 조선은 중국이 통제하던 개항장의 관세 업무를 넘겨받아 검역권을 행사하게 되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실제적으로 일본이 개항장 검역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산, 제물포, 원산, 의주, 평양 등지에 일본 영사관 소속 의사나 공사관 파견을 받은 ..
[신문사 사진 오류 1] 대한제국 대한적십자사 제복? 2019년 천지일보에는 개화기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 여러 사진이 등장한다. 제공자의 오류인지 기자의 오류인지 알 수 없지만 여러 설명에 오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래 사진을 놓고 1905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설립된 대한적십사사의 사원들의 제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역사: 역사 속 군인(5)," 2019년 3월 9일 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609396 [사진으로 보는 역사] 역사 속 군인 (5)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군 의무병(1905)우리나라는 1903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한 후 적십자 활동을 시작했다. ‘황제의 지존하신 보호 아래 설립하고 빈곤한 병자를 구호하기 위한 목적을 다한다.’는 기치 아래 설립... www.n..
20세기 초 아시아의 에피데믹 1907-1917년 아시아에서 역병으로 최소한 1,000만 명이 사망했다. 1910-11년 만주 흑사병으로 60,000명이 사망한 것은 두 번째 규모였으나 치사율은 100%였다. 그만큼 110년 전 아시아인들은 역병으로 스러져갔다. 다만 일본의 경우와 실론, 싱가포르, 사이암 등에서는 선진 의학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고 있었다. 의료 과학이 국력과 문명의 상징이었다. 이런 전염병이 지난 100년 간 유행하지 않아서 현재 지구인들이 망각해 버렸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무시무시한 에피데믹과 팬데믹이 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인구를 조절하거나 감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18-19세기에는 천연두가 #1 killer였다.) 중국인 의사 오연덕은 1910-11년 만주 흑사병과 1921년 만주, 산동..
한국교회 추수감사절은 미국절기를 그대로 수용한 것인가? 3년 전에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는 주제이지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다시 정리해 본다. ---최근(2017년) 페이스북에 추수감사주일에 대한 글이 몇 개 올라온다. 에도 권영진 목사의 칼럼이 실렸다. 그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교회 추수감사주일(11월 셋째 주)과 구약의 초막절(유대음력 7월 15일)은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절기이다. 2. 유대인의 3대 절기의 하나인 초막절(수장절, 추수 감사)은 한국 음력으로 하면 8월 추석이 되므로, 추석을 한국교회 감사주일로 하면 좋을 것이다. 3. 현재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시대 만주 한인 교회사 연구 절실하다 1924년 이후 만주 시베리아 지역 선교지 분할도를 보자. 이 광활한 지역에 1920년대부터 한인 이민이 본격화되자 그들을 따라 교회와 선교도 따라가게 된다. 사람이 있는 곳에 선교가 있기 때문이다. 보라색 부분인 용정을 줌심으로 하는 북간도 지역 연구는 상당히 축척되었다. 기독교장로회(기장)와 한신(조선신학교에서 발전)의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한신 쪽 신학자들이 북간도 캐나다장로회 선교와 김재준, 윤동주, 문익환 등 개인 연구까지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감리교회도 일부 연구를 했다. 그러나 노란색 부분인 서간도 지역은 한국 개신교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로스 관련 연구만 35년 전에 한번 정리된 이후, 1921년 4월 신핀(흥경)에 선교지부가 개설되고, 1923년 10월 Cook(국유치..
1920 대한애국부인회 600명 기독교인 여성지도자 검거 [개신교는 한국에서 무엇을 했는가?] 여성 지도자 양성과 독립 운동 1919년 삼일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정보를 제공한 대한애국부인회 회원 600명이 1920년에 모두 체포되었다. 600명 회원은 모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여성 지도자들이었다. 교회와 학교를 통해 양성한 600여 명의 남자 지도자들이 1911년 백오인사건으로 일망타진되었다면 (8년 후에 상일운동으로 재기), 9년 후 동일한 서북지역에서 600명의 여성 지도자들이 1920년 말 대한애국부인회 검거 사건으로 전부 체포되었다. 이는 기독교가 서북 지역에 들어간 지 실제적으로 약 20년 만에 여성을 계몽, 교육하고 애국 지사로 기르고 조직하여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