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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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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왕비(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다. 이승만의 (1910)에 나오는 사진은 명성황후(민 왕비)가 아니다. 2015. 3. 20. ⓒ옥성득 오늘 (2015년 3월 19일) 다음 기사에서 황필홍 교수는 "1910년부터 1932년까지 발간된 총 5종의 책과 잡지 원본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191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출간한 역사서 ‘독립정신’에 처음 소개된 명성황후 사진(아래 사진 중 첫 번째)이 실제 모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11/2015031102677.html?csmain "이승만 집필 '독립정신'의 명성황후가 진짜" "이승만 집필 '독립정신'의 명성황후가 진짜" premium.chosun.com 그는 또 "만약 명성황후 사진..
1907년 의병 처형 사진 [이 한 장의 사진]흔히 1919년 삼일운동 때 일본군이 한국인을 처형하는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니다. B. L. Putnam Wheal, The Coming Stuggle in East Asia (London: MacMillan, 1909), p. 518에 실려 있기 때문에 1907년 의병전쟁 때 일본군이 의병을 처형하는 장면이다. [이보다 앞서 프랑스 잡지에 1907년 8월 1일자에 실려 있다고 한다.]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 많은 한국인들이 총살되자, 외국 신문 잡지들은 그 사진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위의 책에 있는 사진을 전재하고 마치 그렇게 한국인들이 잡혀 처형된 것으로 알렸다. 그러나 삼일운동 당시 한국인은 만세 현장에서 총에 맞고 죽었지, 이런 식으로 정식 총살형에..
에스더 쉴즈: 세브란스 간호와 한국간호협회의 산모 세브란스 간호를 세운 에스더 쉴즈 한국 간호의 발전을 위해 40년 간 독신으로 봉사하고 1936년에 은퇴   에스더 쉴즈(Esther Lucas Shields)는 1868년 12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농촌 켈리타운쉽에서 해외선교와 인디언선교를 지원하던 경건한 기독교인 부모 아래 태어나 바르게 자랐다. 1891년 필라델피아종합병원 간호원양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3년간 병자를 간호하던 중, 해외선교 권고를 받고, 부르심이 올 때 가기 위해서 준비했다. 그러나 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그냥 흘러가고 있다고 느끼던 어느 날, 선교에 대한 설교를 들은 그는 동양의 한 나라에 가서 여성과 어린이를 돕기로 결심하고 바로 뉴욕의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지원서를 보냈다. 쉴즈는 제이컵슨 후임으로 ..
숭실학당은1898년 초에 개교 1917년에 발간된 숭실대학 그레함 리 추모 팸플릿, p. 6 1898년 초에 숭실학당이 개교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 베어드는 18명의 학생으로 사범학교를 시작했다. 이들을 훈련시켜 초등학교 교사로 파송할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수가 450명이 된 1900년 숭실중학교인 Academy를 시작했다. 숭실대학은 1906년 봄에 개교했다.
1919 서울 탑골공원 위치 1919년 서울은 군사 경찰 도시구 도시 중앙 청색 원 안에 초록색 탑골공원이 있다. 1920년 서울 (경성) 지도 용산의 분홍색 부분이 군용지로 일본 육군 사령부가 차지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가 탑골 공원 주변과 시내에 배치되어 시위를 진압했다. 서울은 군사 경찰 도시였다.
1919 서간도 북간도 한인 인구 간도 인구서간도에 20만, 북간도에 30만 계 50만
1929 불교 사찰에서 서울 남감리회 수양회 다음은 1929년 10월 말 양주삼 목사가 빅터 피터즈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1929년 11월 교역자 수양회를 도선암 불교 암자에 가서 연다는 사실이다. ​1910년 6월 22-27일 서울 YMCA가 불교 사찰인 진관사에서 제1회 하령회(여름 수양회)를 한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의 첫 템플스테이였다. 그런데 1929년 11월에 서울 남감리회 교역자 수양회를 도선암에서 가졌다는 것은 아래 양주삼 장로사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1919년 3.1운동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는 함께 민족 독립을 외쳤다. 엄연히 다른 세 종교가 민족의 문제와 인도적 차원에서의 운동에서는 얼마든지 함께 만나 일할 수 있다는 역사적 전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이후 한국 교회는 민..
1920년대 간도 시베리아 선교지 분할도 1910-20년대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지 분할 (comity)장로회는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과 북간도 위쪽 담당. ( )안은 1919년 당시 한국인 인구 / 교인 수 1) 서간도(350,000명 /4,600명)는 북장로회, 2) 남만주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봉천노회 3) 북간도(400,000명 / 10,000명)는 캐나다장로회 4) 북간도 위쪽 시베리아 근처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북만노회감리회는 땅은 넓지만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919년 현재 감리회 선교지 전체 한인 인구는 400,000명 1) 북간도 일부와 간도 위쪽 만주 전체는 북감리회 2) 시베리아는 남감리회이러한 분할은 당시 교세가 장로회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도가 장로회 선교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압록강과 두만강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