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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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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병원 전쟁 간호가 삼일운동으로 민족 간호로 전환 러일전쟁으로 발전한 적십자병원의 전쟁간호가 삼일운동으로 민족간호로 전환되다, 1904-1920 1. 러일전쟁과 나이팅게일 적십자 간호의 발전, 1904-1910 1904년 2월 8일 인천해전에서 시작된 러일전쟁은 한국 간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훈련된 일본 간호부의 활동은 한국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1905년 7월 대한 적십자사병원의 설립을 가져왔으며, 정부 차원의 간호학교를 구상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 의료와 간호의 식민지성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열매를 맺기 전에 한국 정부의 간호 사업은 메말라 죽고 말았다.제물포 적십자병원, 1904제물포적십자병원에서 일본인 간호부의 돌봄을 받는 러시아 군인들, 1904 (일본의 선전 엽서) 러일전쟁 발발 이튿날 일본군은 일본적십자병원 간..
수운교 도솔천 [수운교 도솔천] 3년 전 대전에 있는 수운교 도솔천에 들어가 천단을 보았다. 외부인에게 보여 주지 않는데 특별히 들어갈 수 있었다.유불선 동학이 혼합되었으나 불교화된 천도교였다. 사진은 그 도솔천 천단에 들어가는 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늘 잠겨있다. 한 때 수십 만 신도가 구름처럼 모였으나 이젠 노인 몇 남은 동학계 민족 종교. 한 절에서 온 젊은 스님이 주일 법회를 인도한다고. 낡은 본부 사무실을 지키는 회장이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교주가 말한 예언들이 이루어진 예들을 설명했다. 좋은 부동산을 가진 서구의 한 교회를 본 느낌. 미래의 한국 교회를 훔쳐본 것일까?
너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참으로 믿었느냐? 세례로 본 한국 개신교회사----- 최근 한 여검사의 고발로 모 전직 검사의 어중간한 세례 간증과 교회의 변명이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130년 간의 한국교회사를 세례라는 관점으로 거칠게 간단히 살펴보자. 1. 목숨을 걸고 경건하게 세례를 받다, 1879~1890년1879년(고종 16년) 초에 두 명의 의주 청년이 만주 우장의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갔다. 그들은 친구 백홍준의 부친이 로스 목사로부터 받은 한문 신약전서와 소책자를 2년 이상 몰래 읽어 왔으며 예수교를 더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매킨타이어는 이들을 중국인 교회 초신자 반에 편입시키고, 한문에 능한 한 명에게는 한글 복음서 번역을 맡겼다. 당시 로스 목사는 안식년 휴가로 영국에 가 있었다. 두 청년이 세례를 요청하자 ..
1925-35 조선 철도 노선도 다음 지도는 1920년대 중반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도이다. 역 이름을 쓰기 위해 지도를 변형해서 재미 있게 보인다. 부산-서울-의주 노선과 대전에서 갈라지는 호남선, 서울-원산의 경원선, 원산 -함흥--나진-회령의 함경선 등이 완공되었다. ​장로교회는 이 철도 노선을 따라 선교지부가 형성되면서 급성장할 수 있었다. ​1911년 11월 압록강 철교의 완성으로 경의선이 선양까지 가는 안동선과 연결되어 만주-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연장되었다. ​인천에서 파리로 가는 시베리아대륙횡단철도를 탈 경우, 서울-의주-선양 노선을 택하지 않고, 대개 인천에서 대련까지 기선을 타고 가서, 대련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대륙횡단철도를 탔다. 그게 시간적으로나 편리성에서 더 나았다. 다음은 1930년대 중반의 철도 관..
1931 신정 찬송가의 가사 개정 노력 1931 신정 찬송가의 가사 개정 노력 좌절 아래는 진보적인 장로회 선교사 William C. Kerr의 "The Revision of the Union Hymnbook," Korea Mission Field (Nov. 1925): 241-243에서 243쪽이다. 1923년 조선개신교선교회공의회는 찬송가위원회를 조직하고 새 찬송가를 만들기로 했다. 기존 재고가 거의 없어졌고, 동경 대지진으로 인쇄 원판이 사라졌고, 청년층이 부르기에 편한 가사로 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잘 부르지 않는 곡은 없애고 새 곡을 넣을 필요가 있었다. 2년 간의 예비 작업을 거친 후 최종 찬송가 개정위원회 위원으로 선발된 자는Miss M. E. Young, 변성옥, 김인식, William C. Kerr 4인이었..
1971 목사 계층 분화: 도시 중산층 목사, 농촌 목사, 도시 빈민 목사 1971년 목사라는 직업, 두 가지 유형으로 분리되다 도시의 중형 교회 중산층 목사 vs 시골의 작은 교회 가난한 목사 모이는 도시 교회의 군림하는 목사 vs 이농으로 흩어지는 시골의 섬기는 목사 도시에서는 사모의 치맛바람 vs 시골에서는 사모의 몸뻬 봉사 도시 월 평균 20,000원 월급 vs 시골 교인 50명이 되어도 월급 4,000원 해방 이전 초기 목사와 시대에 부응한 목사들 이들은 양 떼의 목자요 종으로 전도인들이었다. 지식이 뛰어나지 않았으나 투철한 사명감과 뜨거운 전도열이 있었기에 한 지역 교회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요 문명의 선구자로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길선주 목사를 필두로 시대에 부응하는 목사는 불가피하게 이용도를 낳아 명맥을 이어갔고 해방 후 분단 상황에서 ..
1970 목사 월 2만원 봉급에 여대생에 인기 없는 직업 수입 적고 인기도 없는 목사라는 직업, , 1970년 12월 14일.월 봉급 2만원으로 5인 가족 부양하루 수면 6시간에 휴가도 없이 쥐꼬리 월급지난 15년 간 신도수는 3배 증가했으나, 목사 봉급은 제자리모 여대 졸업생 600명 중 목사와 결혼한 자는 1명20개 직업 중 인기도는 17위 [당시 이발사 수준]--이런 푸대접 결과 돈을 밝히는 성공한 목사들이 7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으니, 일종의 revenge?지난 50년 목사들의 성공은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1931 남궁억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남궁억, "일하러 가세," (1931), 219장​3.1 운동 후 한국 사회를 변혁해 나간 기독교인들의 노동/디아코니아 찬송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곧 금일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3.1운동 후 한국 사회를 변혁시켜 나간 기독교인들의 노동가요 전투가. 언제 이 노래를 평양에 가서 부를 수 있을까?"봄 돌아와 밭 갈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