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80)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상재 선생 사진 발굴] 언론사에서 아래를 참조하여 인용 보도해도 좋습니다. 사진 출처: Moffett Korea Collection,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Library, NJ 설명: 마삼락(Samuel Hugh Moffett) 박사가 평생 수집한 후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마페트 자료 안에서 오늘 이상재 선생(중앙기독교 청년회 YMCA 총무)의 사진을 새로 발굴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진은 희미한 것 뿐이나, 이것은 사진관에서 정식으로 찍은 초상 사진 원본을 스캔한 것이다. 이 얼굴은 기존에 알려진 사진과 약간 다르다. 기존의 것은 모두 희미하거나 얼굴 부분만 오려진 것이며, 좀 더 나이가 드셨을 때 찍은 것이다. 50대에 찍은 것으로 보이고, 반신 전체가 나오는 이 사진을 이후 독립.. 1910 Korea for Christ George T. B. Davis는 백만구령구령운동(Million Soul Movement) 당시 한국을 방문하고, 대부흥의 열기가 대전도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책 Korea for Christ 안에 담긴 여러 사진은 1909년 한국 교회의 여러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외에도 더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을 찾으면 초기 한국교회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 안에 있는 모든 사진을 올린다. 스크랜턴의 고베 거주지 주소 문제 [아주 사소한 문제] 1917년 11월 스크랜턴(W. B. Scranton, 1856. 5. 29 - 1922. 3. 23) 의사는 일본 고베로 이주했다. 스크랜턴에 대해서는 이덕주 교수간 쓴 대작 (2014, 879쪽)이 있다. 이 책 822-830쪽에 고베 거주지를 첫 2년 간은 우라마치(浦町) 41번지로, 1919년부터는 야마모토도리(山本通) 산죠메(三丁目) 40번지로 밝히고 있다. 후자에서 별세할 때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 1월 고베영사관에 제출한 어빈 의사의 부인이었던 Bertha K. Irwin의 여권 신청서를 보면, 신분 보증인에 스크랜턴 의사가 나오고, 그는 지난 26년 간 어빈 부인을 알아왔다고 보증을 하면서, 자신의 주소를 65 나니와마치(浪花町)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1921 배화학당 교사들 서울 남감리회가 운영하던 배화여학당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이다. 모두 당당해 보이고 지적이고 세련되었다. 한국인 남자 교사는 한 명이 양복에 머리에 기름을 바른 신식 패션이나, 여자 교사들은 아직 파마를 한 신여성 차림은 없고 모두 전통적인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다. 다만 여자 선교사는 신여성 차림이다. 1921 마산문창교회 마산문창교회, 1921 남녀 출입문이 분리되어 있다. 들어갈 때 오른쪽이 여성 출입구. 대부분의 교회가 해방 이전 두 개의 출입문으로 남녀 좌석을 구분했다. 1935 전주서문외교회 신축한 전주서문외교회 예배당 모습, 1935 1914 조선성공회 한국인 첫 사제(김마가, 구바나바)와 트롤로프 주교 Mark Napier Trollope, a nephew of the British novelist, was consecrated as the third Anglican Bishop of Korea in 1911. He sits here with the first Korean ordinands, in 1914. 1921 전주 남자성경학교 남자성경학교, 여자성경학교가 자리를 잡아가던 때의 모습이다. 한해에 30일간, 이어서 두 달 간, 이어서 6개월 수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신도 지도자 훈련이었다. 1920년대는 한국에서 '민중'을 발견하는 시대였다. 교회에서는 평신도 훈련과 사역이 증가했다.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9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