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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첫 구약전서, 1911 [1] 1882년 첫 한글 복음서인 로스의 가 나온 지 30년 만인 1911년 3월 한글로 된 첫 가 발행되었다. 1906년에 발간된 공인역본 와 더불어 공인역본 가 1911년에 발간되면서, 한국교회는 온전한 성경 전서를 한글로 읽게 되었다. 이를 1938년의 개역본과 구별하기 위해서 구역본이라고 부른다. 1911년 3월 일본에서 10,000부, 서울에서 10,000 부 초판 구약전서가 발행되었다. 당시 개신교인이 10만 명 정도였으므로 다섯 명 중 한 명이 가질 수 있었다. 한 가정에 한 권으로 보고 발행한 듯하다. 그러나 활자가 커서 만 해도 2,650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라, 상하 두 권으로 분책을 했다. 상권은 창세기부터 역대하까지 1,350면, 하권은 에스라부터 말라기까지 1,300면이었다...
1950. 6. 25 주일 영락교회 주보 영락교회 1950년 6월 25일 주일 주보이다. "벧아니"(베다니) 78호라 하여 1948년부터 주보를 발행한 듯하다. 1950년은 전도의 해였다. 주일 성수, 십일조, 개인 전도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복음적인 교회의 구호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정예뱌, 구역예배, 전도회들의 전도 운동을 했다. 주보 앞 면에 목사 (한경직, 강신명) 외에 전도사, 권사, 시무, 성가대 지휘, 반주 이름은 있으나 장로 이름은 없다. 오전 11시 예배는 예정대로 드렸으나, 바로 전쟁의 소식으로 서울은 허둥지둥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일 저녁 예배는 소수가 모여서 드렸을 것이다. 우리는 한치 앞도 보지 못한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무화과 잎이 무성하면 여름이 온 것은 안다.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
한국 전쟁과 기독교 어떤 책이 있나? 최근 발행순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선별했다. 2015, 윤정란, , 한울엠플러스. 2000년에 숭실대 박사, 여성사, 독립운동사, 개신교사 전공 학자. 탈식민주의 입장. 한국교회의 주류화 과정 추적. 2015, 김창식, , 쿰란. 반공 포로(인민군) 출신 목사, 숭실대 졸, 서울신대 졸, 미국에서 목회, 교수, 체험과 비화를 중심으로 서술.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시각. 2009,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러시아연방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 러시아 측 1차 사료가 번역 정리되어 있다. 1945년 이후 북한에 진주한 러시아군의 작전 명령들이 북한교회 이해에 도움이 된다. 1999, 김흥수,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교회사 전공 저자의 서울대 종교학과 박사논문을 책으로 출판했다...
한국의 첫 여자 목사 채핀 Chaffin 자매 Chaffin, Anna Margaret Bair, 蔡富仁, 1883~1977: 1911년 결혼하고 남편 채핀 목사를 따라 1913년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16년 6월 남편과 사별하고 미북감리회 소속 선교사가 되어 서울 감리회 여자성경학원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앨버트슨(Albertson)의 별세로 그 후임 원장이 되었다. 안식년(제1차)때 뉴욕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1919-1920)했다. 1920년 한국에 돌아와 학교명을 감리회 협성여자신학교로 바꾸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안식년(제2차) 에는 콜럼비아대학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우리 집》선교잡지 편집인과, 《절제 The Tempreance News》발행인으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1931년 6월 ..
1897 독립신문의 하나님 독립신문과 하나님 용어 문제 독립신문이 "하ᄂᆞ님 용어 토론"에 영향을 준 사건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 즉위식 때 일어났다. 이날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면서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드렸다. 독립신문은 이를 하ᄂᆞ님께 드린 제사로 표현했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의 왕이 황제였기 때문에 천제를 드렸다. 그러나 조선 왕국에 오면 천제는 세조 이후 중단되고, 중국의 황제만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였기 때문에 이를 하늘에 고했다.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외교 질서의 축이던 중화주의가 무너지고, 이어서 대한제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발생한 정치적 대사건을 상징하는 의례였다. 10월 12일 오전 2시에 거행된 황제 즉위식은 한 밤이라 서울의 모든 집들이 등을 밝히고 태극기를 달고 애..
1910. 6. 10 김배세 세브란스병원간호학교 1회 졸업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 제1회 졸업생 김배세 교사 경력 갖추고 영어에 능해 두각 나타내 [2013-01-29 오전 11:19:06] ◇ 미국 간호학회지 논문과 영어교재 한글로 번역 ◇ 보구여관 학생들과 연합 강의·실습 통해 교류 김배세(金背世, 1886∼1944)는 1906년 9월 쉴즈(Esther Shields) 간호원이 설립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Severance Hospital Nurses' Training School)에 1907년 1월에 첫 학생으로 입학하여, 1908년 예모식을 거쳐, 1910년 6월 10일에 제1회로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 최초의 한국인 졸업간호원이 되었다. 그녀는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인 아버지 김흥택과 어머니 연안 이 씨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아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 표지와 강명편, 1882 1882년 로스의 누가복음 표지 둘 영국성서공회(BFBS) 아카이브가 오래 전에 캠브리지대학교 도서관으로 이전했다. 고문서실 안에는 원본이 두 권 있었다. 최초의 한글 복음서이다. 표지 1 캠브리지대학교 전시본 광세 팔년 /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 심양 문광셔원 간 광세는 중국 청나라의 연호로 8년은 1882년이다. 아래 공간에 BFBS(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도서관 도장을 찍었다. 위에는 사서가 손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Gospel of St. Luke in Corean. Rev. W. Wright. Sec. of Bible Society, London. with compl[emen]ts of JR. Newchwang, 24 March, 1882" 곧 "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다시 읽기 옥성득,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다시 읽기," , 2019년 5월호 ‘평양 대부흥’은 1907년 1-6월 평양 시내 장로회와 감리회의 교인들과 학생들에게 일어난 회개와 각성 운동이었다. 성령 강림으로 심각한 죄를 회개하고 공개 자백, 중생 체험, 용서, 배상, 헌신을 통해 교회가 변하고 많은 불신자들이 개종하였기에 ‘대’부흥이었고,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된 점에서 ‘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이를 처음부터 부흥이나 대부흥(great revival)으로 불렀고, 종교 각성(awakening)이나 오순절(Pentecost)로도 불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은 20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 글에서는 ‘평양 부흥’으로 부르겠다. 이 글은 여러 책에 나오는 평양 부흥의 배경,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