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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흑사병 유행, 1910-11 110년 전 겨울, 만주에 발생한 흑사병 Black death 14세기 흑사병으로 2,500만 명이 죽은 이후 가장 강력한 폐렴 흑사병이 1910-11년 만주에서 발생하고 기차 노선을 따라 급속하게 퍼지면서 수 만 명이 죽었다. 1911년 한 도시에서만 매일 180여 명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케임브리지 출신 의학자 오연덕(吳連德)은 페스트가 기침, 재채기, 대화할 때 공기 속에 흩어져 있는 병원체로 감염되는 폐 페스트이며, 그 매개체도 쥐나 쥐벼룩이 아니라, 산속 바위틈이나 평지에 굴을 파고 사는 마르모트라고 주장했다. 마르모트 가죽이 피혁시장에서 인기를 끌자 너도나도 마르모트 사냥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페스트가 사냥꾼을 통해 전파되었다. 1910년 10월에 발생해 11월에 하르빈으로 번진 후..
장로교회 분쟁: 김선두, 길선주, 변인서 목사 배척 사건, 1923-1934 평양기독교역사 9, , 2019년 10월호. 1920년대는 분규, 파업, 동맹휴학의 시대였고, 장로교회도 안팎으로 투쟁과 분열의 시대였다. 밖으로 사회주의와 진화론으로 무장한 반기독교 운동과 대결하던 교회는 교회 분쟁, 미션스쿨 동맹휴학, 병원 간호사 파업이 지속되면서 내부 분열로 힘을 잃고 사회적 영향력을 점차 상실했다. 기독교 수용 40년 만에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이 글은 학교나 병원 분쟁은 제외하고 교회 분쟁만 다룬다. 1910년대 초에 시작된 교회 분열이 선교사의 권위주의에 반발한 한국인 목사들의 자유교회 운동이라면, 1920년대 중반 이후 10년간의 교회 분열은 노쇠한 당회(선교사, 한국인 목사와 장로)의 독재와 권위주의에 반발한 신세대 평신도들의 개혁 운동이었다. 교회 분규는 장로회 정치를 ..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배척과 교회 분립 사건, 1925-27 옥성득, "장로교회 분쟁: 김선두, 길선주, 변인서 목사 배척 사건, 1923-1934," , 2019년 10월호 中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배척과 교회 분립 사건, 1925-27 부분 1924-25년에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지속되면서, 평양 예수교를 비판하는 「개벽」(開闢) 지의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 등장했다. 군산, 재령, 해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서 반기독교 운동과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김익두에게 권총으로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평양 교인들은 반기독교 기사를 쏟아내는 「개벽」에 대해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기독신보」는 교회개혁 논설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장대현교회는 1922년 6월에 2년간 옥고를 치른 길선주(吉善宙, 1869-1935) ..
1919년 3월 3일 맹산 대학살 사건 (53명 살해): 수정 보완 맹산 대학살, 1919 1919년 3월 3일 [평안북도] 맹산 마을에서 몇 명의 일본인 군인들이 마을 시위 지도자를 체포한 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헌병 지소로 연행해 갔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 함께 가면 지도자를 석방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군인들을 따라 헌병지소까지 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헌병지소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한 후, 문을 걸어 잠갔고, 이어서 총을 난사하여 모든 주민을 잔인하게 죽였다. 56명이 총질을 당했으나, 3명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 사망한 53명 중 15명은 여성이었다. An Open Letter by the Korean Women (1919), p. 2. 이 자료만 있어서 일본 선교사들도 과연 이것이 사실이었을까 의심했다. 다음 마페트(Samuel A...
너희가 가진 ‘물’을 제단에 세 번 가득 부어라 열왕기상 18장 갈멜산 위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아세라 제사장 850명이 대결한 이야기는 주일학교 때부터 들은 유명한 사건이다. 바알/아세라 제사장들이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후, 엘리야가 기도하니 바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 위 송아지를 불태우고 제단 아래 도랑 물까지 다 말랐다. 이로써 야훼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이 증명되었고, 바알/아세라 제사장들은 다 죽임을 당했다. 질문 그런데 이 드라마틱 이야기에서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 있으니, 불이 아니라 바로 물이다. 3년 간 비가 오지 않았는데 (지금 서울에 3년 간 비가 안 오고 수도물이 극히 제한적으로 공급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일 집을 나설 때 물 몇 병은 반드시 챙기지 않을까?) , 갈멜 산 정상에 마..
유교 제사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 추도식과 신사참배, 1895-1940 기윤실 , 2019년 9월 6일, 수정본 https://cemk.org/14327/ 유교 제사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 추도식과 신사참배, 1895-1940(옥성득) 현존 교회사는 개신교가 제사 문제에서 관용이나 타협 대신 처음부터 엄격한 금지 정책을 채택했다고 서술해 왔다. 비록 일제 강점기 말에 총독부의 강압으로 일본 조상신을 섬기는 신사(神社)참배를 종교 의례(우상숭배)가 아닌 국가 의례(시민 의무)로 수용했으나, 해방 이후에는 제사 금지 정책을 견지하면서 초기의 제사 금지론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제사 신학의 역사는 간단하지 않으며, 교회의 정책은 변화해 왔 cemk.org 제사가 예배(worship)인가 추모와 숭경(reverence)인가를 놓..
105인 사건, 1911-15 옥성득, "기독교 민족주의와 105인 사건, 1911-1915," , 2019년 7월호 1911년 10월 12일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 학생 2명이 총독 살해음모죄로 체포되면서 시작된 ‘조선음모사건’은 1912년 9월 28일 서울지방법원 1심에서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105인 사건’으로 알려졌다. 1913년 11월 대구고등법원에서 99명이 무죄 방면되고, 1915년 2월 수감 중이던 나머지 6명이 특별사면령으로 석방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글에서는 연구가 덜 된 사건 원인, 체포와 구금 과정, 관련 문서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 원인: 서북 기독교 민족주의의 성장과 신설된 현병대의 실적 필요 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일으킨 동기나 이유는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지금까지 정치, 사회..
"문명 개량 진보"의 120년 1907년 8월 13일 도쿄에 있던 전 내무대신 유길준은 이토 통치 하의 대한제국이 새 내각(총리 김윤식)을 구성하고, 자신을 내무대신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준비했다. 떠나기 전 그는 전 일본 내무대신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를 만나 정책 조언을 구했다. "자유민권운동가" 이타가끼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인민을 문명화하여 부강에 이르는 것이 상책이듯이. 조선도 일본의 동양 평화론[일본을 리더로 삼아, 곧 한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 백인의 제국주의를 막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동아주의]에 동참하여, 인민을 먼저 문명화시키는 개량 진보책을 채택하라고 충고했다. 지난 120년 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취한 정책과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독..